내 세대의 방송과 이어진 직업을 가진 사람 중 안 그랬던 사람이 없겠지만, 나 역시 열광적인 TV 키즈였다. 신문의 편성표를 외우다시피 하며 필사적으로 사수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려가며 온갖 예능 프로그램과 음악 프로그램, 드라마를 봤다. 그중 일반적으로 미니시리즈라고 부르는 16부작 드라마를 특히 좋아했는데, 언젠가 어른이 된 후 드라마 대본을 쓰게 되리라는 계시 같은 건 당연히 아니었다. 나는 일주일을 꼬박 기다려야 다음 이야기가 찾아온다는 것 때문에 드라마가 좋았다. 언젠가는 끝나지만 당장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것이, 내일까지, 다음 주까지 살아나갈 힘이 되어주었다.
그러다 소위 '인생 드라마'라고 부를 만한 드라마를 만나서 이야기 속 인물들과 함께 울다 웃다 하다 보면 보통 한 계절이 지나있곤 했다. 그러면 한 시절을 드라마 속 인물들과 같이 산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어떤 드라마를 생각하면 방영되던 해의 여름이, 또 겨울이 떠오른다. 보고 있는 드라마의 다음 회차를 만나기 위해서는 일주일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으므로, 그사이에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고, 시험이나 면접을 준비했으며, 일주일만큼씩 나이 들어갔다. 2000년대였고, 20대였다.
지금은 드라마를 기다리는 일이 거의 없다. 한국 드라마를 덜 보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해외 드라마의 경우 대부분 몰아보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음 회차까지 기다림의 시간은 겨우 몇 초거나 길어도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이용하게 된 이후로 몰아보기는 일상적인 습관이 됐다. 새로운 드라마 시리즈 한 시즌과 주말 하루나 어느 날의 밤샘을 맞교환했다. 멈추지도 기다리지도 않고 이야기의 끝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일 역시 나름의 매력이 있었으므로 '끊지 못하고 봤다'는 말을 흔한 칭찬으로 썼다. 보고 싶은 한국 드라마가 있어도 다시 보기로 한 번에 보기 위해 마지막 회가 방영되는 날을 기다렸다. 이 기다림은 호기심에 가까웠고,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면서 살아가는 일주일과는 온도가 달랐다.
'콩트가 시작된다'는 일본에서는 4월 중순에서 6월 중순까지, 한국에서는 5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왓챠를 통해 단독공개된 일본 NTV의 드라마다. 아직 방영이 끝나지 않은, 따라서 어떤 작품이 될지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운 해외 드라마를 수입하면서 일주일에 한 편씩 공개하는 전략은 모험처럼 보인다. OTT 안에서는 잠시의 답답함에 누른 멈춤 버튼이 영원한 정지로 남는 일이 흔하다. 시청자들은 기다리지 않고 끝을 보는 일에 이미 익숙하다. '콩트가 시작된다'는 내용마저도 시청자들을 붙들어두기 위한 거의 모든 OTT 드라마 시리즈 전략에 반하는 드라마다. '다음 회차 보기'를 누를 만한 강렬한 엔딩도 없고, 끝을 꼭 보고 싶은 뚜렷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끝을 보는 일에도 지지부진한 20대 끝물의 청춘 몇 명이 오늘을 살고 있을 뿐이다.
고등학교 동창인 하루토(스다 마사키)와 쥰페이(나카노 다이가), 슌타(가미키 류노스케)는 개그 트리오 맥베스를 결성해 10년째 활동 중이다. 인기는 없다. 번아웃으로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한 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나카하마(아리무라 가스미)는 회의를 하러 일주일에 한 번씩 가게를 찾는 세 사람의 팬이 된다. 퇴사 직후 히키코모리처럼 지내던 나카하마를 돕기 위해 함께 살기 시작한 동생 츠무기(후루카와 고토네)까지 맥베스를 알게 되면서, 이 다섯 사람은 연예인과 팬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애매한 관계로 알고 지내면서 서로의 삶에 조금씩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콩트가 시작된다'는 매회 맥베스의 콩트 한 편으로 시작해 한 회만큼의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콩트의 엔딩을 보여주며 마무리되는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1회의 콩트 제목은 '물 문제'로 물에 손을 대면 메론 소다라는 음료로 변해버리는 아르바이트생이 주인공이다. 이 콩트로부터 어떻게 나카하마가 맥베스를 알게 되었고 또 팬이 되었는지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카하마가 보통의 관객이나 시청자의 눈에는 크게 재미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맥베스의 콩트에 빠진 것처럼, '콩트가 시작된다'의 매력 역시 보고 있으면 천천히 드러나는 종류의 것이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고, 보통 사람이 하는 고민을 한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삶은 더욱 녹록지 않다. 뚜렷한 기승전결이 없는 인생을 하루씩만 사는 청춘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아무리 간절해도,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 살다 보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다음 스테이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맥베스 세 사람이 코미디언이 되었음에도 인기를 얻고 이름을 알리는 데는 실패한 것처럼. '콩트가 시작된다'는 이런 인물들의 고민과 마음을 들어주는 데 시간과 마음을 쓴다.
3회에는 사는 내내 우등생이었던 나카무라가 직장에서 어떻게 소진되어 갔는지를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아도 순식간에 불행해질 수 있는 게 삶이며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열심히 하지 않는 쪽을 택하게 된다는 나카무라의 고백을, 동생 츠무기와 맥베스 세 사람은 조용히 들어준다. 눈물을 흘리는 나카무라에게 쥰페이가 발을 닦은 수건을 건네자, 이들이 모여있던 작은 방에는 눈물 대신 웃음이 번진다. 섣불리 위로하지 않는 이들 사이에 왁자지껄한 다정함이 흘러넘친다. 그 다정함이 흘러와 나에게 닿았을 때, 나는 이 드라마의 다음을 기다리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20대 때 일주일을 기다리며 본 드라마 속 인물들 역시 '콩트가 시작된다'의 캐릭터들과 비슷했다. 간절하게 꿈을 꾸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당황하고, 하고 싶은 일도 바라는 것도 없어 텅 빈 자신을 발견하고, 사랑만으로 쉽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어리둥절한 청춘들. 때로 지리멸렬하고 대체로 내게만 가혹한 것 같은 삶을 그래도 누군가와 같이 견디기를 택하는 먼지 같은 인물들에게 그 시절의 나를 많이 겹쳐두었다. 그래서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기다리지 않으면 다음 이야기를 보지 못하듯이, 내 인생의 다음 장 역시 기다려야 온다는 걸 그때 드라마를 보며 배웠다.
9회에서 마지막 공연의 콩트 순서지를 보는 순간, 우리가 매회 시작과 끝에 봐온 공연은 모니터 속에 있던 과거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될 맥베스의 마지막 공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일은 결국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서 좋아하는 일에 승부를 걸었던 한 코미디언 팀의 마지막 공연을 보는 일과 같다. 인생도, 사랑도, 일도, 꿈도, 승패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모두 주어진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이 결국 끝난다는 걸 우리는 살아가며 경험을 통해, 그리고 좋은 이야기를 통해 배운다. 최선을 다했을 때만 덜 후회할 수 있고 잘 질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한 시절이 마무리된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그런 걸 배울 때면, 사람들은 참 자주 운다는 것도.
'콩트가 시작된다'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동안 7월이 흘러갔다. 세계가 더없이 소란한 와중에도,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일상은 지루하고 고요했다. 더위 때문에 생산성과 집중력이 떨어진 밤이면 스마트폰의 절전모드처럼 사는 건 아닌지 걱정하기도 했다. 억지로 밝기 조정을 당해 미묘하게 어두워진 채로, 에너지 소모가 크면 울려대는 경고 알림에 곧바로 꺼지듯 잠드는 날이 이어졌다. 그래도 착실하게 시간이 흘러 토요일이 찾아 오면 '콩트가 시작된다'를 봤다. 이 글이 독자들을 만나게 되는 7월 24일 토요일, '콩트가 시작된다'의 마지막 회인 10회가 왓챠에 올라온다. 사람들의 바람과 소망을 이뤄주던 하루토는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결정을 내릴까? 맥베스의 해체 공연은 어떤 모습이고, 마지막 콩트인 '이사'는 어떤 내용일까? 아직은 알지 못하지만 기다리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 같다. 하루에도 날씨가 몇 번씩이나 변하는 세계를 살면서도 바이러스 때문에 내내 집에 머무르며 고요히 지쳐가던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콩트가 시작된다'를 기다렸던 덕분에 견딜 만한 2021년 7월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