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의 중앙일보 기고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천하의 대세를 따라야 창성한다’는 대목이었다. 중국 중산층이 5억 명에 달하고 10년간 22조 달러(약 2경5,000조 원)의 상품을 수입할 것이란 문장이 뒤따른 걸 보면 천하 대세는 대륙의 경제적 부상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는 한중 무역 규모가 한미, 한일 무역액을 합한 것보다 많다는 점도 부각시켰다. 중국이란 대세에 순응해야 한국도 창성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싱 대사는 이어 한국 경제의 기둥인 반도체를 끌어들였다. 중국이 전 세계 집적회로 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있고 한국 메모리 반도체의 80%가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드 보복을 떠올리면 다음 타깃은 반도체가 될 수 있다는 뉘앙스도 느껴진다.
그는 반도체 기술 경쟁에서 편 가르기를 원하는 한국 경제계 인사는 한 명도 없다며 이는 한국인이 대세를 잘 읽는다는 걸 보여준다는 평가까지 덧붙였다. 미일 편에 서지 말고 지금처럼 잘 처신하란 주문에 가깝다.
기고문을 싱 대사의 사견으로 치부할 순 없다. 인터넷 댓글도 검열하고 통제하는 일당독재 전체주의 국가에서 외국에 파견된 대사가 본국 허락 없이 공개 기고를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본국 정부의 의도와 속내가 반영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런 싱 대사의 글에 인상이 찌푸려지는 건 상대방을 존중하기보단 머릿수와 힘의 논리로 굴복시키려는 오만 방자함이 곳곳에서 묻어나기 때문이다.
‘천하’라는 단어부터 천자가 다스리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란 시대착오적인 세계관을 전제로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대세’도 전쟁과 무력을 통해 패권을 다투던 시대에 더 어울리는 용어다. 다시 전근대적 중국식 질서를 강요하려 드는 무의식이 엿보인다. ‘중국은 대국, 주변국은 소국’이란 중국 외교관의 뿌리 깊은 고질병도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2016년 당시 천하이 중국 외교부 부국장도 우리 기업인을 만나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냐”며 “사드를 배치하면 엄청난 고통을 주겠다”고 협박한 바 있다. 이후 롯데는 중국 시장에서 철수해야 했다.
중국이 머릿수나 면적에선 큰 나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대국일지라도 한순간에 패망하는 일은 역사에서 비일비재했다. 597년(고구려 영양대왕 8년) 수 문제도 비슷한 문장을 보내온 적이 있다. ‘그대는 요수의 넓이가 장강과 비교할 때 어떠하다 생각하나, 고구려 사람들이 진나라보다 많다고 여기나, 죄를 추궁하려 한다면 장군 한 명에게 명령을 내리면 충분하다, 그대는 짐의 뜻을 잘 알고 더 많은 복을 구하도록 하라.’ 400년 만에 대륙을 통일하고 의기양양했던 수나라는 천하 대세를 앞세워 고구려를 침략했다. 결과는 역사에 기록돼 있다.
사실 중국의 반도체 협박도 성립 자체가 안 된다. D램의 경우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71%도 넘는다. 미국까지 포함하면 95%다.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 경제가 한국 반도체가 없다면 돌아갈 수 없다.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19로 반도체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중국이 K-반도체를 배제할 경우 다른 곳(미국이나 일본)에서 구하는 건 더 힘들다. 낸드도 한미일의 점유율이 99%다. 이를 모르지 않는 중국도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미국은 이를 간파하고 반도체 장비가 중국으로 가는 것도 막았다. 중국은 오히려 한국 반도체에 고마워해야 할 판이다. 이게 지금 천하의 대세다.
수 문제의 국서에 고구려의 강이식 장군은 “이런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게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맞섰다. 21세기의 칼은 경제이고 첨단기술이다. 우리가 지금 뭘 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