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돔'에 갇혔는데 김장을? 왜 드라마는 온통 겨울일까

입력
2021.07.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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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2시간제 도입·코로나19로 
제작 일지 당겨진 사전 제작, 방송 환경 급변

북태평양고기압이 대기 하층을, 티베트고기압이 상층을 덮어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열돔'에 갇혀 전국이 폭염으로 끓고 있는데, 왜 드라마는 온통 겨울일까.


무스탕에 목도리 걸치고 '겨울 로맨스'... '쪄 죽겠네'

요즘 드라마는 현실과 딴판이다. TV 밖은 열대야로 잠을 설치는데 남녀 주인공은 무스탕과 코트를 입고 로맨스를 펼치고(KBS2 '이미테이션' JTBC '월간 집),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청소년들의 얼굴과 귀는 날이 추워 늘 뻘겋게 얼어 있다(SBS '라켓소년단'). 목까지 덮은 티셔츠를 입은 중년의 사내는 검은색 코트를 손에 들고 엘리베이터 잡기에 바쁘고(TV조선 '결혼 작사 이혼 작곡2'), 버스정류장 행인들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핀다(tvN '간 떨어지는 동거').

차림새뿐 아니라 일상도 월동 준비에 한창이다. 다 같이 모여 김장(tvN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을 끝낸 곳도 있다.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 등 방송사와 콘텐츠 플랫폼 가릴 것 없이 최근 한 달 새 소개된 새 드라마의 계절은 한겨울이다. 배우들이 줄줄이 두꺼운 털옷을 입은 걸 본 시청자들은 온라인에 '계절이 너무 달라 몰입이 안 된다' '날도 더운데 옷까지 두꺼워 쪄 죽겠다' 등의 글을 올렸다.

21일 기준 '너는 나의 봄' 등 지상파와 종편에서 방송 중인 미니시리즈(월~금 방송 기준) 여섯 작품 중 다섯 작품의 주 배경이 겨울이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시청자 반응에 따라 이야기도 바꿀 수 있고, 방송 당시 계절의 정서를 공유하는 '생방송 드라마'가 주로 제작됐다. 오랫동안 이런 작품에 길든 시청자들이 현실과 180도 다른 계절의 드라마들을 잇달아 접하다 보니 이질감이 커진 것이다.


80%가 겨울... 사전 제작, 드라마 기상 이변

현실과 다른 드라마의 계절 역주행이 잦아지는 이유는 사전 제작이 늘어서다. ①주52시간제 의무화와 ②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급변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내년 상반기 공개를 목표로 로맨스 드라마를 기획 중인 한 대형 드라마 제작사 대표는 "주52시간제 의무화 도입 전엔 사전 제작을 하더라도 빨라야 2~3개월 전에 들어갔는데, 이젠 최소 6개월 전에 시작하지 않으면 방송 전 제작 분량을 확보하기 어려워 드라마와 현실의 계절 분위기를 맞추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2년여 전부터 50~300명 이상 사업장에 도입된 드라마 제작 현장의 주52시간 근무는 이달 1일부터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적용, 드라마 사전 제작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가을동화' '겨울연가' 등 계절 드라마 보기 힘들 것"

여기에 1년 반 넘게 코로나19가 지속하면서 드라마 제작 일지는 더욱 앞당겨졌다. 10년 넘게 드라마 기획을 해 온 한 PD는 "코로나19로 언제 촬영이 중단될지 모르고 제작 속도도 더뎌져 분량 확보를 위해 사전 제작을 더욱 앞당기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방송 중인 '월간 집'은 지난겨울에 사전 제작이 한창 이뤄졌고, 4월에 촬영이 끝났다. 드라마에 눈이 내리는 이유다. 코로나19로 실제 상당수 드라마가 제작이 늦춰지고 있다. 그룹 EXID 멤버이자 배우인 하니가 20일 코로나19에 확진되면서 JTBC 새 드라마 '아이돌' 촬영은 연기됐고, KBS1 일일드라마 '속아도 꿈결'도 출연자가 코로나19에 감염돼 19일부터 23일까지 결방한다. '라켓소년단'은 방송 도중 코로나19 등으로 제작에 차질을 빚어 주2회에서 주1회로 방송 편성이 변경되기도 했다.

여러 방송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1주일에 한 번씩 배우와 스태프들이 보건소에 가서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검사 결과지를 내지 않으면 촬영장에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촬영이 불가피해 방역에 종종 구멍이 뚫리고 이 과정에서 촬영이 연기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연주형 김종학프로덕션 본부장은 "주52시간제와 코로나19 이슈는 계속 안고 가야 할 작업 환경"이라며 "앞으론 여름에 코트 입고 찍은 겨울 드라마를, 겨울엔 반팔 입고 찍은 여름 드라마를 더 자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드라마와 현실의 시간이 어긋나면서 '가을동화' '겨울연가'처럼 특정 계절을 소재로 한 드라마 제작도 어려워질 전망이다.


송혜교가 한여름에 긴 소매 옷 입은 이유

현실과 드라마 사이 벌어지는 계절의 간극을 배우들은 '몸'으로 메우기도 한다. SBS에서 11월 방송을 목표로 기획 중인 드라마 '지금은 헤어지는 중' 관계자에 따르면 송혜교는 요즘 긴 소매의 옷을 입고 촬영하고 있다. 한여름에 촬영 중이지만 늦가을인 방영 시점을 감안해 배우들이 가을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다. 20여 명의 배우가 소속된 한 매니지먼트회사 이사는 "시청자들이 느낄 계절의 이질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배우들도 패션모델처럼 한두 계절 앞선 옷을 입고 촬영하는 사례가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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