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의 꼬인 실타래를 풀어 보려 추진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일본 방문과 정상회담 협상이 끝내 결렬되면서 양국의 공방은 책임 소재를 따지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협상 내내 시큰둥했던 일본의 무성의가 1차적 원인이지만, 올림픽이라는 비정치 행사에 과거사 문제 해결 등 ‘정치적’ 반대 급부를 얻어내려 한 문재인 정부의 전략도 무리수였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20일 KBS라디오에 출연해 전날 문 대통령의 도쿄올림픽 개막식 참석이 무산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협상에) 상당한 성과가 있었지만 국민께 설명할 수 있는 수준에는 약간 못 미쳤다”고 말했다. “대통령께서도 굉장히 아쉬워했다”고 해 청와대의 실망감이 작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사실 한일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는 그리 높지 않았다. 줄곧 정상 간 만남에 미온적인 신호를 보낸 일본 측 태도 탓이었다. 스가 요시히데 정부는 협상 내내 단 한 차례도 ‘문 대통령의 도쿄올림픽 참석을 희망한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물밑 협의 내용을 자국 언론을 통해 연일 유출하며 내심 청와대가 먼저 방일 무산을 결정하기를 원하는 듯한 무신경으로 일관했다. 과연 한일관계 개선 의지가 있기는 하느냐는 힐난이 나올 법도 했다.
정상회담 결렬의 결정타가 된 소마 히로히사 주한일본대사관 총괄공사의 망언을 수습하려는 성의도 부족했다. 소마 총괄공사는 앞서 15일 성적(性的) 표현을 써가며 문 대통령의 대일외교를 비판해 파문을 일으켰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는 “정상회담 개최에 조금이라도 의욕이 있었다면 자국 외교관의 부적절한 행동을 어떻게든 빨리 처리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끝까지 문 대통령의 올림픽 개막식 참석 의지를 꺾지 않았다. 겉으론 도쿄올림픽 성공을 응원하는 차원이라지만, 한일정상회담 등 ‘성과’를 한결같이 조건으로 내세웠다. 강제동원ㆍ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최악으로 평가받는 과거사 갈등 해법 마련이 정부의 목표임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외교가에선 ‘계기’ 선택이 세련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개막식에 참석한 해외 정상에 대한 예우 문제는 주최국 소관이라는 점에서 ‘손님’인 한국이 너무 많은 요구를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 메시지를 극도로 꺼리는 올림픽 성격을 감안하면 정치적 합의를 방일 전제로 내건 자체가 모순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본 정부는 감염병 이슈까지 터져 올림픽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의 이런저런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성과를 수반하는 정상회담을 강력히 원한 한국 측 자세가 (정상회담 무산의)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직격하기도 했다.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한일관계 이슈를 정상 간 담판이란, ‘톱다운 방식’으로 한번에 해결하려던 정부의 조급증도 협의가 무위에 그친 원인이 됐다. 외교 소식통들의 말을 종합하면 우리 정부는 과거사 문제 외에도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철회’를 핵심 성과로 요구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양국은 2019년 7월 수출규제 조치 발표 뒤 2년 동안 꾸준히 의견을 교환했지만, 협상에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외려 “한국이 강제동원 판결에 대한 구체적 해법을 제시해야 관계 정상화를 할 수 있다”는 일본의 입장은 더 강경해지는 흐름이었다. 위 전 대사는 “옳고 그름을 떠나 일본의 조건에 해법을 제시하지 않고 덜컥 수출규제 철회에 합의하자고 하면 일본이 순순히 응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실무선 논의조차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는데, 정상급 합의 제안이 먹힐 리 없다는 뜻이다.
우리 정부는 수출규제 철회 반대 급부로 ‘한일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정상화’를 약속했다고 한다. 2019년 8월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했던 정부는 미국이 반발하자 같은 해 11월 ‘종료 효력 정지’로 한발 물러섰다.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한미일 협력을 중시하는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으로 지소미아로는 더 이상 일본을 압박하기가 어려워졌다”면서 “효력을 상실한 카드를 앞세워 일본을 설득하려 했던 전략부터 부실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