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제재로 국제사회에서 북한 노동자의 해외 체류가 금지된 지 1년 이상이나 지났지만, 러시아에선 여전히 이들이 암암리에 외화벌이를 하고 있다고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가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취업이 아닌 관광·학생 비자로 러시아에 입국해 돈을 버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과의 관계를 순탄하게 끌고 가려 하는 러시아 정부가 겉으로만 '제재 준수' 입장을 취하고는 실제 현실엔 눈을 감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WP에 따르면, 러시아 극동 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유명 광고 웹사이트엔 주택 건설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북한 노동자 정보만 다루는 별도 게시판이 운영되고 있다. 이 지역의 건설 현장 관리인들은 "안보리 제재 발효 이후에도 북한 노동자들과 일을 했다"며 "북한 노동자들은 일을 잘하면서도 인건비는 저렴하기 때문에 수요가 많다"고 전했다. 요식업에도 북한 출신 노동자 상당수가 종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로 여성들이 한식당 종업원으로 일한다고 한다.
지난 2017년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2397호)에 따라, 유엔 회원국들은 2019년 말까지 자국에서 일하는 모든 북한 인력을 본국으로 송환하기로 했다. 북한 노동자들이 벌어들인 돈이 김정은 정권에 그대로 흘러들어가 핵무기·미사일 개발에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안보리 제재 이전까지 해외에선 일하던 북한 노동자는 중국 내 5만 명, 러시아 내 3만 명 등을 포함해 총 10만 명 정도에 달했다. 이들의 연간 수입은 5억 달러(약 5,737억 원)가 넘는 것으로 추산됐다.
지금도 북한 노동자가 잔류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선 러시아 정부도 일단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큰 문제는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취업 비자를 소지한 북한 노동자 511명(2020년 3월 기준)이 러시아에 체류 중이긴 하지만, 취업 허가 기간이 만료돼 자국 내 경제 활동은 할 수 없다는 이유다. 지난해 마리아 자하로바 외무부 대변인은 제한적 교통 수단과 같은 '객관적 어려움'으로 인해 유엔 제재 시한에 맞춰 모든 북한 노동자를 송환시키지 못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처음 발병한 작년 1월 말 이후 일방적으로 국경을 전면 차단했던 북한 정부 책임으로 돌린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체류 중인 북한 노동자들이 현지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게다가 북한인에 대한 러시아의 관광·학생 비자 발급이 유엔 제재 발효 시한을 앞두고 급증한 것도 '불법적 외화벌이'가 지속되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WP는 지적했다. 2018년 5,000건 미만이었던 관광·학생 비자 발급 건수는 2019년 각각 1만6,000건과 1만 건으로 총 2만6,000건까지 늘어났다. 코로나19로 왕래가 힘들었던 지난해에도 북한인 2,600명이 학생 비자를 받아 러시아로 건너갔다.
앞으로도 러시아가 북한 노동자의 본국 송환에 적극 나서진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아르툠 루킨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연방대 교수는 "러시아에 남은 북한 노동자를 외면하는 것이 김정은 정권 유지를 바라는 러시아의 대북 원조활동"이라고 표현했다. 안보리 제재에다 코로나19 사태로 국경까지 봉쇄하면서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은 최근 이례적으로 유엔에 식량난 현황 및 원인을 상세히 보고할 정도로 국제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