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친환경 흐름에서 추진 중인 글로벌 에너지기업들의 석유 관련 자산 매각이 되레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란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환경 정보에 대한 공시 의무가 없는 비상장 기업이나 방만한 국영 석유기업들이 매물로 나온 석유 자산을 헐값에 인수, 사업 확장에 나서면서 탄소 배출 또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에너지기업들에게 화석연료에 기반한 사업 매각보단 탄소 포집이나 활용, 저장기술(CCUS) 등을 통한 탄소 배출량 저감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15일 글로벌 에너지컨설팅업체인 우드맥킨지에 따르면 현재 글로벌 석유업계에 매물로 나온 석유 및 가스 자산 규모는 1,400억 달러(약 160조 원)에 달한다. 미국(엑손모빌, 쉐브론)과 유럽(로열더치쉘, 토탈, BP, 에니) 등 글로벌 에너지기업들이 지난 2018년 한 해 동안 매각한 자산만 281억 달러 수준이다. 향후에도 300억 달러 이상 자산이 추가로 매각될 예정이다.
기업들의 이런 분위기는 환경운동가와 투자자들은 물론 파리기후변화협정에서 일관되게 합의된 탄소배출량 감축 요구와 무관치 않다. 글로벌 기업들 사이에서 석유 관련 자산을 매각하고 수소와 재생에너지 사업 투자에 나선 분위기가 형성된 배경이다.
문제는 이렇게 나온 석유 관련 자산이 비상장 중견기업이나 사모펀드에서 투자한 기업, 국영 석유회사 등으로 넘어가면서 부작용이 초래되고 있다는 데 있다. 친환경엔 무관심한 이 기업들은 인수한 유전 등에서 최대 규모의 생산에 나서는 한편 인수 이후 탄소 배출량이 늘어난 사례도 빈번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업체는 영국의 비상장 화학기업인 이네오스 에너지다. 지난 3월, 미국 원유 생산업체인 헤스 코퍼레이션의 덴마크 내 석유 및 가스 자산을 1억5,000만 달러에 사들인 이네오스는 원유 생산에 박차를 가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2050년까지 석유 생산 중단을 천명한 덴마크 정부 방침과는 대조적인 행보다.
유럽 에너지 업체인 하이텍비전도 올해 엑손모빌의 영국 내 유전 탐사 및 생산 자산의 일부 지분을 10억 달러에 사들였고, 태국 국영 석유기업인 PTT는 지난 2월 BP의 오만 내 가스 유전 지분 중 20%를 26억 달러에 인수, 중동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RBC캐피탈마켓의 비라즈 볼크하타리아 애널리스트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주요 기업들이 탄소배출을 감축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관련 자산을 처분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자산 매각은 배출 주체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바뀌는 것일 뿐 기후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글로벌 에너지기업들에게 요구된 화석연료 자산 매각도 재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이에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해선 '공급'이 아닌 '수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분석도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제이슨 보도프 미 컬럼비아대 글로벌에너지정책센터장은 “기업들이 석유 자산을 매각해도 수요에 변화가 없는 한 전체적인 탄소 배출량은 줄지 않는다”면서 “다만 기후목표를 달성하려면 석유 수요가 급감해야 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이 그렇지 못한 게 문제"라고 말했다.
국내 업계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국내 최대 규모의 정유사업자인 SK이노베이션은 지난 3월 북미지역에 보유한 셰일오일 광구 지분과 제반 설비를 매각했고, 지난 4월엔 윤활유를 제조·판매하는 SK루브리컨츠의 지분 40%를 매각했다. 이에 대해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 사장은 지난 1일 열린 스토리데이에서 “포트폴리오 중심을 카본(탄소 배출)에서 그린으로 확실히 옮기겠다”고 밝히면서도 “우리가 카본 비즈니스를 하면서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데, 그걸 매각한다고 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있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업계 관계자는 “석유 등 에너지 대기업들이 탄소중립의 압력에 못 이겨 자산을 매각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라면서 “오히려 대기업들이 석유 관련 사업을 책임져 관리하고 CCUS 등을 통해 탄소 배출을 줄여나가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