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 오후 3시. 맞벌이 아들 부부를 돕고자 손주 등·하원을 챙겨온 70대 임모씨는 이날도 아들 가족이 사는 서울 마포구 아파트에 있다가 어린이집 차량 도착 시간에 맞춰 나가던 길이었다. 여느 때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렸다. 손주가 기다릴까 발걸음을 재촉하려는 찰나 주먹이 날아들었다. 처음 보는 남자, A(27)씨였다. 키가 190㎝에 달하는 그는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면서 바닥에 쓰러진 임씨의 머리를 밟고 짓이겼다.
택배기사와 아파트 앞 상점 상인 등 네 명이 달려왔지만 건장한 체격의 A씨를 뜯어말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들 중 한 명은 임씨가 얼굴을 걷어채였을 때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무자비한 폭행은 20분간 지속됐다. "젊은 남성이 노인을 폭행하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도착했을 때 임씨는 피를 많이 흘린 채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구급대원이 그의 외관을 보고 사망했다고 잘못 추정했을 정도였다.
임씨 아들이 응급실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얼굴은 처참했다. 얼마나 세게 찼는지 얼굴에 남은 신발 자국은 몇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임씨는 안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이비인후과, 성형외과를 돌며 전신마취가 필요한 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의사들은 저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라'고 임씨 가족에게 말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놀라 쓰러질까 봐, 며칠간 병원에 오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가 위급 상황을 넘기자 임씨 아들은 경찰서로 갔다. 거기서 마주한 가해자는 처음 보는 청년이었다. 아파트 같은 동, 같은 라인에 살고 있다는데 마주친 기억은 전혀 없었다. 무슨 이유로 연로한 아버지를 죽도록 때린 걸까. 분노 어린 의문이 허무하게도, A씨는 폭행 이유를 묻는 경찰 질문에 "쳐다봐서"라고 답했다.
실제 A씨의 범행 장면이 녹화된 아파트 폐쇄회로(CC)TV 영상에서도 A씨가 느닷없이 임씨를 향해 몸을 틀고 폭행을 시작할 만한 이유는 감지되지 않는다. 가해자 본인조차 "쳐다봐서" "눈이 마주쳐서" 이상의 범행 이유를 대지 못하는, 이른바 '무동기 폭행'의 전형이다. 피해자가 방비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이런 사건은 올해 들어서도 알려진 것만 여러 차례다.
2월 14일 경북 구미시에선 30대 남성이 60대 남성을 느닷없이 때려 치아가 여러 개 부러지는 중상을 입혔다. 당시 이어폰을 끼고 골목에 앉아있던 가해자 A(31)씨는 귀가하던 B(65)씨가 자신을 쳐다보자 "뭘 봐"라고 말하며 폭행했다.
지난달 18일에도 40대 여성이 서로 모르는 사이인 80대 노점상 여인을 상대로 머리카락을 라이터로 태우고 주먹으로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다. 범행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슈퍼마켓 앞이었다. 일주일 뒤인 25일 밤 10시 20분 서울 강북구에선 50대 남성이 대로변에서 일면식도 없는 20대 여성에게 "나랑 자자"고 말을 걸고, 여성이 거절하자 폭행했다. 가해 남성은 술에 취한 상태도 아니었다.
전문가들은 무동기 범죄의 잠재적 원인으로 '기분장애'에 주목한다. 기분장애는 감정 조절이 어렵고 비정상적 기분이 장시간 지속되는 것으로, 우울증과 조울증(양극성 장애)이 대표적이다. 박선영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기분장애가 있으면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느끼고 과격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마포 아파트 사건은 전형적인 분노폭발형 무동기 범죄"라며 "이런 유형의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사람들이 스트레스에 취약해졌다는 뜻이고, 이는 기분장애와도 관련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4월 공개한 기분장애(질병분류코드 F30~F39) 질환의 건강보험 진료 현황을 보면, 기분장애로 진료받은 인원은 2016년 77만7,781명에서 지난해 101만6,727명으로 4년 새 30.7% 증가했다.
기분장애 급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과 관련 있을 개연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정확한 데이터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코로나19로 활동범위가 제약되면서 발생하는 스트레스 현상인 '코로나 블루'가 기분장애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통상 불경기가 심화하면 사회구성원 전반의 정서가 불안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서울역에서 '묻지마 폭행'으로 여성 피해자의 광대뼈가 함몰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경찰청은 공공장소에서 발생하는 폭력행위를 집중 단속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무동기 폭행은 별다른 전조나 인과관계 없이 일어나는 탓에 예방하기가 쉽지 않다는 한계가 있다. 공 교수는 "무동기 범죄는 (범인 검거 가능성이 큰) 공개된 장소에서 발생하더라도 예측이 안 돼 통제하기가 어려운 특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약한 처벌은 무동기 범행 억제의 또 다른 난관이다. 피해자에 따라선 오래도록 신체적·정신적 후유증이 남는데도, 가해자는 단순 폭행범으로 간주돼 1년 안팎의 징역형을 받는 게 보통이다. 2018년 1월 수원에서 "어깨를 부딪혔다"는 이유로 김모(당시 39)씨에게 폭행당한 뒤 후유증을 겪어온 조모(42)씨는 올해 1월 10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가해자 김씨가 받은 처벌은 징역 8개월이다.
마포 아파트 사건만 해도 당초 경찰은 A씨에게 지금의 살인미수 혐의가 아닌 중상해 혐의를 적용했다. '맨손 폭행'이란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피해자 가족이 반발하며 살인미수죄를 적용해달라는 고소장을 제출하자, 경찰은 A씨 혐의를 살인미수로 변경해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도 이대로 기소했다. 다만 법원도 A씨를 살인미수죄로 처벌할지는 미지수다. 경찰 출신 박성배 변호사는 "통상 살인미수는 징역 6년 이상을 선고받지만 상해는 1년~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는다"며 "살인미수로 기소될 경우 흉기 유무가 유죄 판단의 주요 근거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제약을 극복하고 무동기 폭력을 억제하려면 범행 원인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사당국과 전문가들은 이런 범죄의 특성을 감안한 새로운 분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경찰청 관계자는 "어떤 범죄를 '무동기 범죄' '묻지마 범죄'라고 부를 경우,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대책을 마련하기 곤란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현주 가톨릭관동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이상행동범죄'라는 용어를 제안하면서 "이런 부류의 범죄에 대한 명확한 해석과 관리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