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은의 야구민국] 무명 고졸에서 프로야구 신인왕, 이동수에게 '완생'이란?

입력
2021.07.16 14:39
이동수 경북고 타격 코치 
92년 고졸 우선 지명으로 삼성 라이온즈 입단 
95년 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첫 신인왕 타이틀 
2007년부터 5년 동안 지역 방송 해설가로 활약



"삼성 유니폼을 입은 걸 보면 삼성 소속은 맞는 것 같은데, 이름도 얼굴도 낯설단 말야?"

90년대 초반, 대구의 모 고등학교 야구장에 프로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나타났다. 그것도 일주일에 이삼일 정도 야구장에서 혼자 연습을 했다. 때론 후배들과 함께 연습경기를 뛰기도 했다. 학교 학생들은 어리둥절했다. 텔레비전으로 야구 꽤나 봤다는 친구들도 그의 이름과 얼굴을 몰랐다. 추리 끝에 내린 결론은 '삼성 라이온즈 2군'이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궁금증은 여전히 남았다.

"아무리 2군이라도 삼성 선순데, 왜 삼성 연습장이 아니라 고등학교 야구장에서 연습을 하지?"

그때 한 학생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삼성 2군에서도 경기를 못 뛰니까 여기 와서 저러는 거겠지."

'연고 지명 선수'로 삼성 라이온즈 입단

학생들의 추리는 정확하게 맞았다. 고등학생 선수들과 연습경기를 뛰던 '삼성 선수'의 이름은 이동수였다. 92년 고졸 우선 지명으로 삼성에 입단해 2군에 들어갔다. 지금은 고졸 출신 프로라고 하면 고교 야구를 주름잡던 쟁쟁한 선수를 의미하지만 당시는 사뭇 달랐다. 프로에서 2군을 활성화하기 위해 고졸 선수를 대거 입단시켰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입단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행운의 케이스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조금 일찍 태어났더라면 프로에서 고졸 자체를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었고, 조금 늦게 세상에 나왔다면 높은 합격선에 애를 먹었을 수도 있다.

지금도 2군은 정착지가 아니다. 1군으로 올라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1군과 비교하면 대접이 하늘과 땅 차이이고 분위기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선진 야구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급조한 2군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졸 2군 선수의 존재감은 한 마디로 '미생'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사실 고졸 우선 지명이었지만 온갖 잡일도 맡아서 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일주일 중 반은 고교에서 연습했고 나머지 반을 경산에서 2군 훈련을 했다. 당시에는 훈련이 '훈련'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선배들 배팅 볼 던져주고, 훈련이 끝나면 그 공들을 주워 담았다. 선배들의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했다. 연습경기가 있는 날도 경기는커녕 잡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를테면, 당시 경산 훈련장의 점수판은 점수가 날 때마다 사람이 일일이 판을 갈아 끼워야 했는데 그 역시 그의 몫이었다. 그런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훈련이 시작됐다. 해 질 무렵부터 늦은 밤까지 매일 배트를 휘둘렀다. 2군에서도 '미생'이었지만, 믿는 구석은 있었다. 이대호만큼은 아니더라도 덩치 하나는 단연 눈에 띌 정도로 우람했다. 힘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 힘을 보여줄 날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늘 머릿속에 맴돌았다.

2군 첫 경기에서 홈런

"한번 나가서 쳐봐라."

느닷없이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김 충 2군 감독이 그를 대타로 출전시켰다. 김 감독은 누구보다 훈련에 열심히 임하는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힘은 타고났고, 지금처럼 열심히 훈련해서 기술만 끌어올리면 누구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선수라고 판단했던 거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박스를 내려놓고 방망이를 들고 잠시 몸을 푼 뒤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그 연습경기가 어느 팀과의 대결이었는지, 또 누가 공을 던졌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공 2개를 그냥 지켜만 봤다. 2스트라이크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물러설 순 없다’는 생각에 다음 공이 날아올 때 있는 힘껏 방망이를 돌렸다.

"어, 넘어갔다!"

덕아웃에서 터져나온 목소리였다. 공은 포수의 글러브에 들어가 있었다. 넘어간 건 방망이였다. 방망이가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삼진 아웃이었다. 뭔가 보여주고 싶었지만, 보여준 거라곤 방망이를 담장 너머로 던지는 괴력밖에 없었다.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선배들 방망이를 정리하고 있는데 감독이 다음 타석에 다시 내보냈다.

"넘어간다!"

이번에는 공이 넘어갔다. 두 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기록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삼성 2군에서는 한 경기에서 방망이와 공을 담장 밖으로 넘긴 건 이동수가 유일하다는 우스갯소리가 회자됐다. 이 경기를 계기로 2군 경기에 투입되는 일이 잦아졌고, 실력도 조금씩 올라갔다. 2군 경기 출전만 해도 그에게는 대단한 일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 충 감독이 은인이었다. 김 감독은 무던하게 훈련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2군 코치들을 불러 "이동수에게 신경 써라. 좀 키워봐라"는 주문을 했다. 그렇게 그의 실력을 조금씩 끌어올리며 2군 정예 멤버에 안착시킨 것이었다.

그해 8월 드디어 2군 4번 타자에 안착했다. 2군이었지만, 공 줍고 물 나르던 선수가 4번을 거머쥐었다는 건 파란이었다. 이를 놓고 수군대는 선배들이 적지 않았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고 외치던 시절이었다. 새파란 고졸, 그것도 보조 선수의 급부상이 달가웠을리 없었다. 실력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노력하고 마음먹은 만큼 성과가 나왔다.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안타가 터지거나 공이 담장을 넘어갔다. 선배들의 마음도 조금씩 돌아섰다.

그리고 9월 1일,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1군 엔트리 수가 늘어나는 날이었다. 이때 다시 김 감독이 나섰다. 그는 1군 우용득 감독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물건이다. 후회 안 할 테니, 한번 기용해봐라"고 몇 번이나 권한 끝에 콜업이 왔다.

1군 첫 타석에서 '어라, 뭐 이런 공이 다 있지?'

1군 진입, 그리고 '완생'? 언감생심이었다. 1군은 또 다른 격전장이었다. 1995년의 삼성 라이온즈 라인업을 보면 2군에서 아무리 펄펄 날던 선수라도 감히 이름을 끼워 넣기는 힘들겠단 생각이 절로 든다. 강기웅, 류중일, 김용국, 김성래, 이만수, 김한수까지 말 그대로 쟁쟁한 선배들이 버티고 있었다. 당시 전천후 내야수에 호타준족이었던 정경훈(95년 한화 이글스 이적) 선수도 자리를 못 잡을 정도였다. 1군에 콜 업 된 후 일주일간 선수단을 따라다니기만 했다. 경기는 꿈도 못 꿨다. 벤치에서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게 다였다.

벤치워머 신세가 언제까지 이어지나 고민이 깊어질 즈음 기회가 왔다. 5회에 김성래 선수의 대수비로 1루에 나갔다. 6회 초 1군 첫 타석에 섰다. 결과는 땅볼 아웃이었다. '바로 교체겠구나'. 낙담해서 벤치에 앉아있는데 감독이 교체 신호를 하지 않았다. 9회에 다시 한번 기회가 왔다. 상대는 당대 최고의 마무리 정명원 투수였다. 첫 공이 포수 미트로 들어올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라, 뭐 이런 공이 다 있지?'

방망이를 휘두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어 하다 보니 어느새 2스트라이크 1볼이었다. 그때 덜컥 '이러다 다시 2군 내려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갈 때 가더라도 방망이나 한번 힘껏 휘둘러보자.'

"딱!"

좌전 안타였다. 프로 데뷔 첫 안타였다. 이동수는 그날 경기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타석에 들어서니까 투수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1루에서 수비를 할 때는 타자하고 포수밖에 안 보이고요. 관중석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다리가 후들후들하는 게, 몸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았죠. 수비할 때 저에게 공이 안 와서 천만다행이었어요. 저한테 공이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경기를 마칠 때쯤에서야 몸이 풀리면서 온전한 정신이 돌아왔다. 그때서야 옆에서 뛰는 선배들과 멀리 관중석,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간간이 기회가 주어졌다. 선발로 출전할 때마다 안타와 홈런을 기록했다. 그해 타율 0.288, 홈런 22개(2위), 타점81(4위), 장타율0.500(5위)로 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첫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미생에서 완생으로의 인생역전이었다.



그는 가장 기억의 남는 경기로 95년 7월25일에 열린 한화전을 꼽았다. 9회말 2사, 3점차로 뒤진 상황이었고, 상대는 구대성 선수였다. 이동수는 타석에서 끝내기 역전 만루 홈런을 쳤다. 프로 최초 3점차 뒤집기 끝내기 역전 만루 홈런 기록이었다. 99년에는 손목 부상으로 6월부터 출장을 했는데도 홈런 19개에 타율 0.320을 기록했다.

96년 이후 변화가 찾아왔다. 백인천 감독이 부임하면서 출장 기회가 줄어 들었다. 97년 쌍방울로 트레이드된 뒤에는 김성근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로 다시 부활하는가 싶었지만 김 감독이 자진 사퇴를 하고 말았다. 그 뒤로 이동수는 저니맨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동수는 최익성과 함께 야구계의 양대 저니맨으로 통한다.) 삼성–롯데-쌍방울-SK-해태-두산의 순으로 팀을 옮겼다. 92년 선수 생활을 시작해 2003년까지 12년간 6개 구단을 돌았다.

중고 신인에서 신인왕, '완생' 이룰 최종 목표는?

그 후 영남대, 계명대, SK에서 타격 코치를 맡았다. 2007년에는 TBC 드림 FM 소속으로 프로 야구 라디오 경기를 중계를 시작해 2012년까지 애청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지금은 경북고등학교에서 타격 코치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고교야구 코치는 프로 코치와 비교하면 또 다른 보람이 있다고 했다.

"어린 만큼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요. 개개인의 특성에 맞게 지도하면 습득하는 속도가 상당히 빨라요. 선수가 변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죠. 이런 선수들을 발견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그는 "물주전자를 들던 때와 똑같은 열정으로 코치로서의 역할에 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세부 목표도 분명했다.

"경북고 선수들이 타격 부분에서 전국 어느 팀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게 해야겠죠. 궁극적인 목표는 팀의 수장인 이준호 감독을 도와 전통과 명성에 걸맞은 강한 팀으로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잘 보좌해야겠죠."

그의 최종 목표가 궁금해졌다. 보조 선수로 시작해 신인왕을 거머쥐었지만, 결국 저니맨으로 떠돌아야 했고, 프로에서 코치 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아마를 가르치고 있다. 그가 꿈꾸는 야구인으로서의 '완생'을 완성시킬 최종 정착지가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기자의 질문에 그는 뜻밖에도 "야구인으로서 말하자면 오래전부터 완생이었다"고 말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행복하다고 하잖아요. 2군에서 물주전자를 나를 때도 야구장에 남아 있다는 것, 계속 야구를 꿈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야구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제 인생은 온전한 완생입니다."

그는 "나중에 팀을 하나 맡게 된다면, 그때는 성적에 얽매인 성과 지상주의가 아닌, 아이들이 야구 그 자체의 재미를 만끽 할 수 있는 팀, 야구 자체로 행복한 팀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박상은 기자 subutai117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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