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이 끝난 지 8개월이 넘었는데도 미 보수세력의 ‘역주행’은 거침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표를 도둑맞았다”는 억지 주장을 되풀이하며 세몰이를 하고 있고, 공화당도 그에 발맞춰 투표 행위를 까다롭게 만드는 주(州) 선거법을 밀어붙이고 있다. 민주당 지지율이 높은 유색인종 유권자의 투표를 제한해 내년 11월 중간선거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포석이다. 민주주의의 퇴행으로 볼 만한 요소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연방정부 차원에서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민주당도 더는 참지 않고 ‘실력 행사’에 나섰다.
트럼프는 11일(현지시간)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열린 미 보수주의 최대 행사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에 참석해 “지난해 대선은 이 나라의 수치”라며 “급진 좌파가 부정 행위를 저질렀다”고 또다시 주장했다. 이어 “빅테크 기업들이 검열로 표를 조작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을 늘어놓는가 하면, ‘선거 사기 증거가 없다’는 언론 보도에도 집중포화를 쏟아부었다. 트럼프가 “좌파는 이 나라 주류가 아니다. 우리가 주류”라고 선언하자, 흥분한 관중들은 “USA(미국)”를 연호했다.
‘트럼프 지지’ 집회를 방불케 한 이날 행사는 보수진영 내에서 여전한 그의 영향력이 재확인된 자리였다. 참석자 대상 모의 여론조사에서도 2024년 공화당 대선 주자 10여 명 중에서 트럼프는 70% 지지율로 압도적 1위에 올랐다. 2위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21%)와 무려 49%포인트 차이였다. 디샌티스는 트럼프 이름을 뺀 여론조사에서만 1위(68%)였다. 미 CNN방송은 “대선이 조작됐다는 트럼프의 주장이 여전히 공화당의 의제를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의 역주행에 공화당은 가속 페달을 달아 줬다. 공화당이 장악한 주정부와 주의회는 우편 투표 제한, 24시간 투표 폐지 등을 골자로 한 선거법 개정에 사활을 걸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유색인종 유권자의 투표율 상승에 기여했다고 평가받은 조항들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뉴욕대 브레넌정의센터 집계에 따르면 올해에만 48개 주에서 최소 389개 투표제한 법안이 발의됐다. 공화당 소속 릭 스콧 상원의원은 이날 CPAC 연설에서 “인종차별이라는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시대착오적 발언까지 불사하며 각 공화당 주정부에 법 개정을 계속 추진하라고 촉구했다.
결국 텍사스주는 이날 미국에서 가장 혹독하다고 비판받는 투표제한 법안을 기어이 재상정했다. 5월 말 주하원에서 민주당 의원들의 집단 퇴장으로 표결이 무산된 이후, 공화당이 지난 8일 상원과 하원에 각각 제출한 새 법안이다. 둘 모두 드라이브 스루 투표 폐지, 우편 투표 규제 부과 등을 포함하고 있다. 10일 청문회에서 텍사스 주민 300여 명이 발언권을 얻어 이튿날 새벽까지 밤을 새우며 반대토론을 했지만 공화당을 저지하는 데엔 실패했다. 공화당은 텍사스주 상·하원 모두 법안을 조만간 본회의 표결에 부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민주당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해 소속 의원들이 아예 주 경계 밖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의결 정족수(3분의 2) 미달로 표결 자체를 무산시키겠다는 초강수다. 이들은 12일 오후 전세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NBC뉴스는 텍사스주의 민주당 하원의원 67명 중 51명이 비행기에 탑승했고, 7명이 뒤를 따랐다고 전했다.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가 소집한 30일짜리 특별 회기가 끝나는 다음 달 7일까지 워싱턴에서 버티겠다는 게 해당 의원들의 각오다. 그러나 텍사스 주법에 따라 강제 복귀 명령이 내려지거나 체포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전선은 이제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데이드 펠런 텍사스주 하원의장은 “주헌법에 따라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의회 정족수를 채울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자 민주당 소속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모든 미국인과 텍사스 주민의 투표권을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 갈채를 보낸다”며 이탈 의원들을 옹호했다. 민주당 주의원들은 같은 당 연방 상원의원들을 만나 연대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지금까진 전임자에 대한 언급을 삼갔던 조 바이든 대통령도 13일 미국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필라델피아를 찾아 트럼프의 ‘대선 사기’ 억지 주장과 공화당의 투표권 제한 시도를 강력 규탄하는 연설을 하며 정면 대응에 나섰다.
문제는 횡포나 다름없는 보수의 역주행을 막을 수 있는 뾰족한 수단이 딱히 없다는 점이다. 지난달 민주당이 연방 차원에서 투표권을 확대하는 법 제정을 추진했으나 상원에서 공화당 반대에 가로막혀 무산되고 말았다. 바이든 행정부는 조지아주 새 선거법이 시민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소송전에도 뛰어들었다. 그러나 최근 연방대법원이 “애리조나주 투표권 제한법은 정당하다”고 판결했던 선례에 비춰, 해당 소송에서 바이든 정부 및 민주당 측의 승소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