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을 ‘파란불’이라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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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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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달이다. 지천으로 피어 있던 꽃도 잠시 주춤한 여름은 온통 푸르다. 짙푸른 나무, 검푸른 바다 위로 잠시 비 갠 하늘은 높푸르다. 그런데 ‘푸른 여름 풍경’이란 이 말이 외국인에게는 심히 수상한 모양이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나뭇잎의 색이 엄연히 다른데도 청색 하늘도 푸르고, 남색 바다도 푸르고, 녹색 산도 푸르다고 하니 말이다. 말만으로는 마치 푸른 계통의 여러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인 양 딱 오해받기 십상이다.

‘푸르다’는 사전에서도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풀의 빛깔과 같이 밝고 선명하다는 것을 통틀어 이른다. 짐작하건대 처음에는 어떤 대상에 빗대어 색을 말하고, ‘무엇과 같은 색’이란 표현으로 그 상태를 그렸을 것이다. 불과 같은 색이면 ‘붉다’, 풀과 같으면 ‘푸르다’, 노루와 같으면 ‘누르다’ 등이다. 그런데 크레파스를 하나하나 짚는 이름은 파랑, 초록, 하늘색 등 다채롭지만, 푸른 상태를 묘사하는 말은 ‘푸르다’ 또는 ‘파랗다’ 등으로 제한적이다. ‘초록’을 인지하면서도 ‘푸른 신호등’, ‘파란불’이라 하니, ‘푸르다’의 외연이 무척 넓은 편이다.

더구나 한국말에서 푸른빛은 생명, 평화, 길조 등 긍정적 상징으로서 사용 빈도가 높다. ‘푸른 시절’은 젊음과 생기가 왕성한 시기의 대명사다. 맑고 신선한 ‘푸른 공기’, 크고 아름다운 포부인 ‘푸른 희망’뿐만 아니라, ‘서슬 푸른 기세’나 ‘푸른 양반’처럼 당당한 세력도 담을 수 있다. 서양에서도 파란색은 옛날부터 행운의 색으로 여겼다지만, ‘월요병(monday blues)’이나 ‘우울증(the blues)’처럼 푸른색은 주로 우울함을 드러낸다. 과거 일본말에는 시녀처럼 낮은 신분에 파랑과 관련된 말이 붙었고, 일본 전통극인 가부키에서는 사악한 존재를 푸른 얼굴로 등장시켰다는 점도 대비된다.

흥미로운 것은 아시아 주식시장에서 빨간색은 상승을, 파란색은 하락을 의미하는데,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파란색이 상승을, 빨간색은 하락을 뜻한다는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색이 다른 의미를 전하는 예이다. 그렇다. 색이 의미를 결정한다기보다 사람들이 색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오늘은 내 남은 날 중 가장 젊은 날’이란 말이 있다. 아직 군데군데 푸릇푸릇할 수도 있고, 희푸르고 엷푸르러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라도 남은 날에 푸른 희망을 걸어 둔다. 더위를 견딘 나무가 빨간 열매를 맺을 때쯤이면 우리도 잘 익은 희망을 따 먹고 있지 않을지?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