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사상 처음으로 원주민 출신 총독이 탄생했다. 캐나다 총독은 공식 국가 원수인 영국 여왕을 대리하는 자리다. 과거 원주민 기숙학교에서 자행된 집단학살 문제로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캐나다 정부가 과거사 청산 효과를 노리며 상징적 조치를 내놨다는 평가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6일(현지시간) 이누이트족 여성인 메리 사이먼을 총독에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트뤼도 총리는 퀘백주(州) 가티노에 위치한 캐나다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건국) 15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역사적인 걸음을 내디뎠다”며 “이 순간을 위해 더 나은 후보를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이먼 신임 총독은 퀘백주 북부 이누이트족 거주지역인 누나빅에서 이누이트족 어머니와 비원주민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청소년기까지 캠핑, 사냥, 낚시 등 이누이트족 전통생활을 했다. 1970년대 캐나다 국영방송 CBC에서 언론인으로 첫발을 뗐고, 이후 이누이트족 권리보호 기관 수장과 덴마크 주재 캐나다 대사를 지냈다. 원주민이 대사에 임명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사이먼 총독은 “이번 임명은 우리 역사에서 반성적인 시기에 이뤄졌다”며 “화해를 향한 긴 여정에서 중요한 진전이 될 것”이라고 자평했다.
캐나다 총독은 실질적 통치 권한을 갖기보단 상징성이 큰 자리다. 그러나 법안에 대한 왕실 인가, 군(軍) 최고사령관 역할, 의회 개회사 선언, 총리의 의회 해산과 선거 요청 승인 등 주요 국가 업무를 맡는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는 “사이먼 총독 임명은 원주민과의 화해, 여성의 권리 증진 등 트뤼도 총리의 정책 우선순위를 반영한 것”이라고 평했다.
올해 1월 직장 내 괴롭힘 논란으로 줄리 파예트 전 총독이 사임한 이후 캐나다에선 원주민 총독 임명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최근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서 어린이 유해 수백 구가 잇따라 발견되며 영국 여왕에 대한 비판까지 불거지는 상황이다. 캐나다는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인디언과 이누이트족, 유럽인과 캐나다 원주민 혼혈인 메스티소 등을 격리해 기숙학교에 집단 수용한 뒤 백인 사회 동화를 위한 ‘문화 말살 정책’을 폈다. 그 과정에서 원주민 언어 사용이 금지되고, 엄격한 훈육 아래 육체적·정신적·성적 학대가 자행됐다.
2015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보고서를 통해 139개 기숙학교에 원주민 어린이 15만 명이 강제 수용됐고 6,000여 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이달 1일 캐나다 건국기념일에는 전국에서 ‘원주민 인종청소’ 규탄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사이먼 총독은 “원주민으로서 이 나라가 겪는 고통과 아픔을 이해한다”며 “우리는 과거의 잔혹행위를 인정하고 추모해야 한다. 내가 총독을 맡는 건 원주민과 캐나다 국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