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의 병을 인정하는 용기

입력
2021.07.06 22:00
27면


고3 때인가요, 어느 날 엄마가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식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던 엄마. 아들 수능 공부해야 한다고 TV도 보지 않던 분이, 밤마다 술을 드시고 세상이 떠나갈 듯 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빠가 술을 숨기거나 빼앗으면, 공부하던 저를 끄집어내서, 너라도 빨리 술을 사와 달라며 엉엉 우는 모습을 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던 날들이었습니다.

우리 엄마가 갑자기 왜 저럴까. 밤이 되면 전쟁을 치르는데, 아침이 되면 아무 일 없는 듯 대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아침에라도 어제 왜 그러셨냐고 물어야 하는 걸까. 모든 게 혼돈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생각했습니다. ‘이게 그 우울증이라는 건가...?’ 하지만 19세의 어린 저는 그게 맞는지도, 맞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 몇 달이고 발만 동동 굴러댔지요.

여러분 혹시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가족이나 연인,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무언가 병이 찾아온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경험 말입니다. 그 시기, 저에게 영향을 준 책이 하나 있었답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리베카 율리스가 1992년에 지은 책 ‘When Someone You Love Has a Mental Illness(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입니다. 참 좋은 책인데, 한국에서는 절판되었지요.

얼마 전, 그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고등학생 시절을 다시금 떠올렸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옮긴 사람은 전문 번역가가 아닌,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었거든요. 본인이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정신장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보가 너무 없어 답답하던 차, 우울증으로 아들을 잃은 어떤 주변인이 전액 출판비용을 대어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후원자는 ‘이 책을 읽게 될 사람들은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마세요’라는 마음이었겠지요. 그래서 이 책은 원서와 다른 부분이 있는데요, 그 청년(후원인 자녀)의 사례로 시작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20여 년 전 그 시절을 생각했습니다. 어린 저의 선택은 ‘거짓말하기’였어요. “학원에서 학부모 상담하러 오래”라고 속여 택시를 태워서, 학원 아래층의 정신과에 힘으로 밀어 넣었던 거였습니다. 20년이 지나, 엄마는 말합니다. 그때 네가 엄마보다 힘이 셌던 게 참 다행이라고, 그렇게 처음 발을 들이고, 내가 내 정신을 돌볼 수 있는 전문가와 약, 도구들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요.

지금도 저희 엄마는, 이젠 저 역시도 마음이 힘들면 정신과를 갑니다. 아무렇지 않게 “안정제 먹어야겠다. 좀 갖다 줄래?”라거나 “엄마 나 그날은 같이 마트 못 가. 나 정신과 진료 잡은 날이야”라고 일상의 언어로써 인식합니다. 그 안에서도 회복은 일어납니다. ‘이상한 게 아니다’라고 서로가 느끼고 인정하니까요.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병들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처음 겪어보았기에 모를 뿐이지요. 그럴 때, 환자 대신 내가 고개를 들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이 책을 읽는 것이든, 병원 앞에 손 잡고 찾아가는 것이든 말이지요. 우리가 작은 용기를 낼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회복은 시작됩니다.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