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K드라마) 마니아 피라(27)씨는 SBS 드라마 '라켓소년단' 5회 예고편을 보고 설렜다. 수도 자카르타가 언급되며 현지 경기 장면이 스쳐 지나가서다. '어떻게 그려질까' 하는 기대는 방송을 보면서 실망으로, 다시 분노로 바뀌었다. 그는 "굳이 인도네시아 비하 장면을 넣지 않아도 의미 전달이 됐을 텐데, 납득할 수 없다"고 한국일보에 말했다. 대학 교수 디안(33)씨는 "'라켓소년단'이 인도네시아를 비하한 첫 한국 드라마로 기억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인도네시아에서 K드라마가 국민적 분노의 대상으로 떠오른 건 '라켓소년단' 사례가 사실상 처음이다. "국가 모독"이라는 한류 팬뿐 아니라 "걸러내지 못한 제작 시스템의 문제"라며 국회의원들까지 가세했다. 드라마를 방영한 SBS는 물론, 드라마를 홍보한 세계배드민턴연맹(BWF) 홈페이지도 '라켓소년단'을 성토하는 글로 도배됐다. 드라마 내용도 문제지만 무성의한 사과 방식도 화를 키웠다. 분노는 3주 가까이 현재진행형이다. 좀체 성내지 않고 적을 만들지 않는 인도네시아의 국민성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사랑한 만큼 미움도 큰 법이다. K드라마 주인공과 배경을 동경하고 주인공 이름을 딴 식당과 카페가 도심 곳곳에 문을 열 만큼 인도네시아는 K드라마를 사랑한다. 심지어 홍수로 온 나라가 상심에 빠졌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K드라마 간판을 걸고 십시일반 기부에 나설 정도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유튜브에서 한류 언급 및 시청비율 세계 1위, 한국에 대한 국가이미지 조사(2018년)에서 '긍정' 비율(96%) 세계 1위다. 대통령의 딸도, 주지사의 아내도 한류 팬이다.
극적 요소를 극대화하기 위한 소소한 설정, 대사 몇 마디 실수로 치부하기엔 상황이 엄중하다. 한국 사회의 인식이 투영됐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이 땅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던 한류가 그 동력을 유지하려면 보다 세밀한 문화 감수성이 필요하다. 인도네시아 K드라마 팬들의 애기를 직접 들어봤다.
'라켓소년단' 5회(6월 14일 방영)는 인도네시아가 자국에서 열린 배드민턴 국제대회에서 한국을 이기기 위해 일부러 질 나쁜 숙소 등을 배정하고 현지 관중들도 무례하다는 식으로 묘사했다. "정말 개매너" "숙소 컨디션도 엉망이다. 지들은 돔 경기장에서 연습하고 우리는 에어컨도 안 나오는 다 낡아 빠진 경기장에서 연습하라고 한다" "공격 실패 때 환호는 개매너 아닌가요" "매너가 있으면 야유를 하겠냐" 같은 대사도 잇따른다. 게다가 SBS가 사과를 SNS 계정 댓글창에 올리면서 오히려 분노를 키웠다.
"배드민턴은 국기(國技)로 여길 만큼 우리나라가 자랑하고 사랑하는 스포츠다. 선수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여줘도 될 텐데 왜 다른 나라 사람을 비하하나. 특히 드라마 주인공들은 대부분 아역배우다. 이들이 드라마 속 차별 발언을 일상에서 따라 하고, 한국 아이들도 모방할 것 같아 걱정이다."(피라·27·회사원)
"'개매너'라는 대사는 너무 심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나온다. 인도네시아에서 개를 뜻하는 안징(anjing)은 치욕스러운 욕이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나 고민했을 정도다. 어떻게 인도네시아 문화를 공부하거나 조사하지 않고 함부로 대사를 만드나. 이번 사건이 반성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켄·25·회사원)
"인도네시아를 차별하는 듯한 대사와 설정에 화가 났다. 예전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한국인 가장이 나왔는데, 옷차림과 설정이 여기 있는 한국인과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시야를 넓혀 인도네시아를 제대로 공부하면 좋겠다." (실비·19·대학생)
"다른 나라 선수들을 홀대한다는 설정은 왜곡이다. 외국 선수와 팀 관계자들은 모두 5성급 호텔에 묵는 걸로 알고 있다. 억울하다.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는 주로 발리 등 인도네시아 관광지만 부각하는 수준이었다. 인도네시아 국민을 다루려면 사실관계에 보다 충실해야 했다." (디안·33·대학 교수)
"납득할 만한 설명이 들어갔다면 이렇게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맥락 없이 나쁜 사람, 나쁜 나라로 몰아간 건 잘못이다. 드라마를 만들 때 인터넷 검색만 할 게 아니라 직접 인도네시아인을 만나고 조사하고 자문을 구했어야 했다." (라만·24·회사원)
"사과문을 봤지만 화가 풀리지 않았다. 청소년과 배드민턴이라는 참신한 소재로 그간 재미있게 본 드라마라 실망이 더 컸다. K드라마는 전 세계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시청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과 문화를 다룰 때 굳이 좋게 포장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비하하는 장면이 없으면 좋겠다." (클라라·16·고교 졸업생)
"사과도 무성의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이 방송국 SNS에 항의 댓글을 5만 건 넘게 올렸는데도 정식으로 드라마 앞이나 뒷부분 또는 공식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리지 않고 댓글에 올렸다. 정말 우리를 우습게 보는구나 싶었다." (타탸나·22·대학 졸업생)
분노의 근본을 파악하려면 인도네시아의 사라(SARA) 원칙을 알아야 한다. SARA는 종족(Suku) 종교(Agama) 인종(Ras) 계층(Antargolongan) 앞 글자를 딴 말로, 이 네 가지 사항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공격적인 표현을 금한다. 차별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언론이나 대중 매체, SNS에 SARA 원칙을 위배하는 내용을 올리면 처벌을 받는다.
SARA는 어릴 때부터 습득하는 국민의 기본 덕목이자 자질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사라를 가르치는 '판차실라와 시민학(PPKn)'이 1957년부터 정규 과목으로 편성돼 있다. PPKn은 ‘픈디디칸(Pendidikan·교육) 판차실라(Pancasila) 단(dan·그리고) 크와르가느가라안(Kewarganegaraan·시민)'의 약자다. SARA 교육은 일부 대학에서도 이뤄진다. 인도네시아 학생들은 일상생활 언행과 작품 활동 등에서 끊임없이 'SARA를 건드리지 말라'는 요청을 받는다. 종교, 인종, 민족, 계층을 차별하지 않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다. 그래서 작은 차별과 비하에 민감하다. 최근 인도네시아 국회(DPR)는 일종의 '차별금지법'인 SARA 관련 법을 만들고 있다.
다양성 존중, 즉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다양성 속 통일)'는 인도네시아의 국가 이념이다. 그 테두리 안에서 6개 공인 종교 신도들과 300여 민족, 각계각층이 어우러져 산다.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다. 다섯 가지 원칙을 가리키는 판차실라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 인본주의, 통합, 사회정의, 민주주의 실현을 담고 있다. 통치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일부 지적도 있지만 품은 뜻은 숭고하다. SARA를 국민의 기본 가치로 여기는 인도네시아인들이 한국 드라마에 등장한 비하 및 차별 장면을 어떻게 바라봤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오래 살고 있는 한인 문화계 인사들은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은 "다른 문화와 친숙해지면 문화적 상상력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풍부해진다"고 했다. 인도네시아 근현대사를 집필한 배동선 작가는 "인도네시아를 정형화한 틀에 가두지 말고 역지사지의 자세로 SARA를 유념해 방송물을 제작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영미 작가는 "일단 드라마 시작 전이나 후에 제작사의 사과문을 게시해야 한다"며 "인도네시아 관련 내용을 넣을 때는 인도네시아 전문가의 자문을 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행히 인터뷰에 응한 10여 명의 K드라마 팬들은 여전히 한국 드라마를 사랑한다. "소재가 참신하고 다양한 장르를 통해 삶의 모습을 흥미롭게 이끌어 가며 촬영·편집 등 완성도가 높다"는 이유다. 이들은 이번 사태가 인도네시아를 제대로 알리고 한류가 바르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