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광주광역시 폐자재 처리공장 '조선우드'에서 일하다가 합성수지 파쇄기에 몸이 끼여 숨진 고(故) 김재순(25)씨와 아버지 김선양(52)씨 사이에는 피보다 진한 대물림이 있었다. 아들 김씨는 아버지 선양씨처럼 ‘제조업 노동자’ '50인 미만 사업장' ‘파쇄기’ ‘산업재해’의 길을 그대로 밟았지만, 부자의 운명은 확 달라졌다.
2002년 6월 제주 제재소 파쇄기에 왼손이 빨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한 선양씨는 네 번의 수술 끝에 손아귀를 쥘 수조차 없는 지체장애를 얻었고, 아들 재순씨는 합성수지 파쇄기에 온몸이 빨려 들어가 한순간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선양씨는 “재순이가 파쇄기가 있는 업체에서 일한다는 걸 알았을 때 한사코 말렸어야 했는데 너무도 후회된다”며 “다친 왼손을 주물러주던 재순이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의 죽음이 작업장에서 일하다 세상을 떠난 수많은 산재 중 하나로만 남지 않았던 배경엔 고(故) 김재순 노동시민대책위(대책위)의 진상조사 활동 영향이 컸다. 대책위는 조선우드 사업주로부터 직접 폐쇄회로(CC) TV를 받아 분석한 결과, 당시 사업장에 △2인 1조 작업 △사고예방 교육 △파쇄날 접촉 방지를 위한 덮개 또는 방호울 설치 △작업자 조작 가능한 위치에 비상정지장치 설치 등 산업안전보건기준 규칙에 따라 준수돼야 할 것들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김씨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뒤 산업안전공단에 의해 작성된 재해조사 의견서 역시 대책위가 밝힌 내용과 동일하게 작성됐다. 6일 한국일보가 입수한 김씨의 중대재해 관련 재해조사 의견서 및 광주고용노동청 보고서, 광주 광산경찰서 내사결과보고서 등을 종합 분석한 결과 재해조사 의견서에서 사고원인으로 지적한 내용이 사업주인 박모(52)씨의 범죄 혐의에 그대로 적용됐다.
이처럼 성실히 작성된 재해조사 의견서는 법원 판결과 동종 산업재해 예방대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광주지법 형사4단독 박상현 부장판사는 지난 5월 28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및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씨에게 이례적으로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해당 업체에도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했다.
광주고용노동청 역시 김씨 중대재해 사고의 후속 조치로 관내 파쇄기 보유 291개 사업장에 대해 산업안전보건기준 규칙 준수 여부를 묻는 자율점검표 제출요구 및 불시 점검에 나섰다. 대책위 진상조사단에 참여한 권오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금속노조 광주전남지부 노동안전보건부장은 “법원 판결문에서 재해조사 의견서에 담긴 내용이 인용된 것을 보고, 초동수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재해조사 의견서는 중대재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작성되고 있지만 한국은 왜 ‘중대재해공화국’이란 오명을 벗지 못하는 걸까. 재해조사 의견서가 본래 취지대로 작성되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어,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동종산재 예방대책을 세울 때 시금석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일보가 정의당 강은미 의원실을 통해 고용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작성한 410건의 재해조사 의견서를 입수해 산재전문 변호사, 보건안전공학과 교수, 법학과 교수 등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분석한 결과, 상당수의 재해조사 의견서가 허투루 작성된 것을 확인했다.
우선 재해조사 의견서에서 조사 담당자의 ‘의견’이 축소·생략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산업안전공단의 중대재해보고서 작성에 관한 ‘재해 등의 기술적 원인조사 업무처리지침’에 따르면 재해조사 의견서는 △사업장 개요 △인적사항 및 상해정도 △재해발생 경위 △재해조사 내용 △조사자 의견 △참고자료(기타) 순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견서에서는 △조사자 의견 항목이 10여 장 되는 분량 중 1장에 불과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지난해 7월 말 도로포장공사에 철근을 운반하다가 굴착기 붐대에 부딪혀 사망한 A(61)씨의 재해조사 의견서에도 조사자 의견이 아예 빠져 있었다.
조사자 의견이 있어도 직접적 사고 원인만 상세하게 서술돼 있을 뿐, 사고의 근본 원인과 대책에 대한 서술은 상당히 미흡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8월 공장 지붕 위에서 빗물 가림막 보강 작업 중 선라이트를 밟아 추락사한 B씨의 재해조사 의견서에는 '사망자가 발을 헛디뎌 선라이트가 파손돼 추락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만 적혀 있었다. 추락한 위치에 안전대나 방어막의 설치 여부 및 미설치 이유, 재발방지 대책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산재 전문가인 손익찬 변호사는 “중대재해현장 초동 수사자료로 쓰이는 재해조사의견서에 근본적인 사고 원인이 빠져 있으면 재판과정에서 산업안전기사 등 전문가들 자문을 다시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 “사고 경위만 장황하게 적고, 근본 원인과 대책을 안 쓰는 행태는 직무유기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의견’이 없는 재해조사 의견서가 산재 예방 취지에 역행한다고 입을 모았다. 산업안전보건법 제56조 1항에 따르면 고용노동부 장관은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원인 규명 또는 예방대책 수립을 위해 조사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중대재해법 전문가인 최정학 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는 “재해조사 의견서가 부실하게 작성되기 때문에 중대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에서 또다시 비슷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라며 “재해조사 의견서가 쓸모없다 보니,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진 것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의견서 작성 시간이 부족하고 소송 부담이 뒤따르는 것도 재해조사 의견서에 ‘의견’을 담지 않는 이유로 꼽힌다. 산업안전보건공단 관계자는 “의견서는 재해조사 착수 후 7일 이내에 관할 노동청에 제출해야 해 현장조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이틀뿐이다”라며 “현장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칫 법적 분쟁에 휘말릴 수 있어 의견보다는 사고 경위만 적게 된다”고 밝혔다. 결국 언론에 보도되거나 사회적 주목을 받는 사건이 아니면, 제대로 된 의견서가 작성되는 경우가 드물다.
일각에선 조사자들의 법적 지위가 보장돼야 의견서 내용이 충실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현행 법령상 재해조사 의견서는 고용부 근로감독관이 작성하는 중대재해 보고서 작성을 위한 의견서 수준에 불과하다. 김태구 인제대 보건안전공학과 교수는 “중대재해조사와 관련해 산업안전공단의 권한은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고 고용부 요청을 통한 내부지침으로만 근거 규정을 두고 있다”라며 “조사자들에게 법적 권한을 부여해야 원인 및 예방대책을 적극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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