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최근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출금) 의혹’과 ‘월성 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 사건을 재판에 넘긴 이후 두 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상부 지시를 꼼꼼히 기록하는 이른바 ‘적자생존'(적는 자만이 생존한다)’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상하 간 불신이 팽배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검사동일체 원칙(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나의 유기적 조직체로 활동)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검찰이 이젠 내부에서도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 모양새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주 새 근무지에 부임한 A 차장검사는 “사건 처리를 위한 보고를 받고 반려할 때 반드시 서면으로 지휘한 내용을 기록하는 걸 원칙으로 하겠다”고 공언했다. 통상적으로 해 왔던 구두 보고는 극히 예외적으로만 허용하겠다는 게 A 차장검사의 생각이다. 그는 “보고를 받을 때는 물론, 상사나 대검찰청 등에 보고할 때도 위아래 의견이 다를 경우 꼼꼼히 다 적어서 남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검찰 고위 간부 역시 “단순한 사건이라도 보고받은 내용이나 지휘한 내용을 모두 문서화하고 있다”며 근거 남기기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최근 몇 년간 이명박 전 대통령 사건처럼 10년이 지난 사건에 대해서도 재수사가 이뤄지고 있다”면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해두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적자생존’의 분위기 확산을 검찰 안팎에선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금 의혹 사건이나 월성 원전 사건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분석한다. 두 사건 모두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거나 공개 수사 지시를 받은 뒤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참모와 법무부 및 검찰, 산업통상자원부 등 공무원들이 개입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김학의 전 차관 사건의 경우엔 중간 간부 상당수가 연루되면서 수사의 대상이 됐고, 월성 원전 사건에선 증거인멸 등 혐의로 중간 간부가 기소됐다. 한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공무원이나 검사들이 부당한 지시를 받았을 때 윗사람의 뜻을 거부한다는 게 쉽지 않다”며 “두 사건에 등장하면서 결국 처벌까지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인 '아래 단계' 공무원과 검사들을 보면서 느낀 일종의 교훈일 것”이라고 말했다.
‘적자생존’이 공직 사회에 회자됐던 건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이후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삼성 측을 도운 정황을 수사할 때부터였다. 당시 공정위 한 공무원은 공정위원장이 결재한 사안을 부위원장이 변경ㆍ지시한 과정을 깨알같이 적어 컴퓨터에 메모 형태로 저장해 본인 책임을 면하고 검찰의 수사선상에서 벗어났다.
이를 두고 당시 공무원들 사이에선 ‘살기 위해선 상사의 부당한 지시는 꼼꼼히 적어둬야 한다’는 뜻의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돌았다. 하급자들이 상사의 부당한 지시로 향후 문제가 불거졌을 때를 대비하고자 하는 한편, 상급자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지휘 근거를 기록으로 남겨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를 준비하겠다는 일종의 ‘보험장치’로서 주목을 받은 것이다. 한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선후배 검사들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서로 믿지 못하고 ‘각자도생’하려는 게 요즘 검찰 내부 분위기”라며 씁쓸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