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을 좋아한다면, 눅눅한 한여름 장마철에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 싶다면 찾아볼 만한 영화 한 편이 개봉한다. 나 감독이 시나리오 원안을 쓰고 제작을 지휘한 한국·태국 합작 영화 ‘랑종’(14일 개봉)이다. ‘셔터’ ‘샴’ 등의 영화로 국내 공포영화 팬들에게 친숙한 반종 파산다나쿤이 연출했다.
태국 동북부 이산 지역의 시골 마을, 모계 혈통을 따라 가문 대대로 바얀 신의 신내림을 받은 무당 님(싸와니 우툼마)은 조카 밍(나릴랴 군몽콘켓)이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 뒤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걸 눈치챈다.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구는가 하면 신경질적으로 낯선 사람에게 욕을 하고 때리기까지 한다. 극심한 생리통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기도 한다. 과거 신내림을 거부하고 동생 님이 신내림을 이어받도록 했던 밍의 어머니 노이는 님에게 해결책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밍은 점점 이상한 행동을 거듭하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님은 밍에게 바얀 신이 아닌 다른 귀신이 씌었다고 확신한다.
태국어로 ‘무당’을 뜻하는 제목의 ‘랑종’은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을 공포영화에 접목한 작품으로 여러 면에서 ‘곡성’을 연상시킨다.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려는 퇴마의식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것부터 그렇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색채도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인물 구도나 사건의 전개 방식은 사뭇 다르다. 무당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는 촬영팀의 카메라를 통해 마치 실제 상황을 보여주는 듯 위장하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도 차이점이다. 무당이 주변 인물 중 하나였던 ‘곡성’과 달리 정중앙에 배치된다는 점도 다르다. ‘곡성’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무당 일광을 태국으로 옮겨와 주인공으로 만든 스핀오프 영화 같달까. 다만 '곡성'의 수수께끼 같은 모호함은 덜하다.
130분이라는 다소 긴 러닝타임의 영화를 보다 보면 두 감독이 공동 연출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절묘하게 두 감독의 숨결이 공존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후반부의 호러쇼를 위해 중반까지 불쾌에 가까운 불길함을 스멀스멀 천천히 쌓아가는 스토리텔링 방식이나 관객의 멱살을 움켜잡고 구석에 밀어붙이듯 저돌적이며 압도적인 공격성은 나 감독의 화법을 닮았고, 예측 가능한 장르의 전형성을 자신감 있게 따르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하는 대중적인 감각은 반종 감독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무당이란 존재에 매혹돼 ‘곡성’을 찍었던 나 감독과 귀신을 믿지 않는 반종 감독의 전혀 상반된 성향이 묘하게 동시에 느껴진다.
일관성 있고 균질하며 완결성 높은 영화를 기대하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엑소시스트’를 ‘곡성’의 세계로 끌어와 ‘블레어 위치’ ‘파라노멀 액티비티’ 같은 페이크 다큐 형식으로 찍은 뒤 ‘REC’처럼 페이크 다큐와 좀비물을 섞은 듯한 영화로 끝맺는 탓에 종종 불균질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거칠고 자연스러운 질감의 기존 페이크 다큐에 비하면 다소 인위적이고 매끄러운 측면이 강해 ‘진짜 같은 가짜’ 느낌이 떨어진다. 인물의 기이한 변화를 흥미롭게 보여주는 초반부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호러 장르의 뻔한 클리셰가 반복돼 신선도를 떨어트리기도 한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 암시하듯 다소 거부감을 일으킬 만한 묘사도 적지 않다.
일부 단점이 있긴 하지만 ‘랑종’은 찝찝하고 으스스한 공포감 하나만은 확실하게 쥐고 나간다. 전반부에 설계해 놓은 공포감이 워낙 강력해 장르적 클리셰가 이어지는 후반부 장면에서도 관객은 끈적한 공포의 늪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심지어 이젠 다소 진부해진 파운드 푸티지(발견된 영상) 형식마저도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무엇보다 관객을 짓누르는 건 인간의 힘으론 어찌해볼 수 없는 강력한 운명의 덫과 인과응보의 족쇄다. 실제로 2일 열린 언론시사회에선 영화가 끝나자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듯 안도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나홍진 감독은 언론시사가 끝난 뒤 “비슷한 소재를 감독으로서 반복하고 싶지 않아 연출 대신 제작을 택했다”고 말했다. 표현 수위에 대해선 "내가 오히려 반종 감독을 말리는 입장이었다"고도 했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태국 촬영 현장을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한 채 화상통화와 파일 전송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며 제작을 지휘했다. 영화를 위해 2년 가까이 태국 각지의 무속신앙을 취재했다는 반종 감독은 화상 연결을 통해 “한국 무속신앙과 태국 무속신앙이 상당히 많이 닮아 있어서 더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