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이 시청자의 웃음을 핑계로 학대적 표현과 성 역할 편견을 부추기는 자막을 쏟아내 논란을 빚고 있다. 유튜브 개인 방송을 방불케 할 정도의 '도'를 넘은 자막이 15세 이상 청소년에게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더욱이 이를 감시하고 제재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6개월째 '개점 휴업' 상태여서 우려를 더한다. 올 1월 방심위 4기 위원들의 임기가 끝난 후 여야의 힘겨루기로 5기 위원에 대한 임명이 늦어지면서 지상파 방송 심의는 아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TV에서 무분별한 자막이 더 쏟아지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온 가족이 함께 보는 지상파 주말 예능이 '혐오 무검열 지대'로 전락했다.
지난달 6일 KBS2 '1박2일'에선 식사 복불복 게임을 하는 장면에서 '먹스라이팅'이란 자막이 큼지막하게 떴다. 먹스라이팅은 '먹다'와 타인의 심리를 조작해 그 사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다는 뜻의 '가스라이팅'의 합성어. 가스라이팅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심리적 위력으로 통제해 벌어진 성폭력 사건에 주로 등장한다. 정서적 학대를 뜻하는 이 '위험한' 단어가 웃음의 소재로 쓰일 수 있을까.
'1박2일' 시청자 게시판엔 '가스라이팅이 웃음거리로 소비될 단어냐'(정은*) '이 단어가 그냥 재미로 사용되는 게 불쾌하다'(문소*) 등의 항의글이 올라왔다. 가스라이팅을 예능에서 희화화하는 것은 그로 인한 폭력성을 사소화시키고, 2차 가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가스라이팅은 '1박2일'에서 '진정한 먹스라이팅' 등의 방식으로 5~6월 두 달에 걸쳐 최소 세 번 이상 나갔다.
지상파 예능 자막이 성고정 관념을 강화한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박찬호 박세리 박지성 등 한국을 빛낸 운동 스타들이 출연한 MBC '쓰리박'에선 한 출연자가 "남자는 드라이브죠"라고 하는 말을 자막으로 강조하고, '나 혼자 산다'에선 아이돌그룹 샤이니 멤버 키를 청소와 요리를 잘하고 다정다감하다는 이유 등으로 '키 이모'란 표현을 여러 차례 내보냈다. 집과 자신을 가꿀 줄 아는 청년을 이모라고 명명, 남자라면 저러지 않을 것이라는 성 역할에 대한 편견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방송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halmonee5*****)엔 이런 글이 급속도로 퍼졌다. '기범이를 이모라고 칭하는 게 싫다. 자신을 깔끔하고 단정하게 꾸미고 가꿀 줄 알고, 직접 기른 식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변의 아끼는 사람에게 나눠줄 줄 아는 30대 남성이다. 남성이라면 저런 걸 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드러나 불편하다. 세상엔 저런 남성도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더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
지상파 예능 자막의 자극성도 짙어지고 있다. SBS '골 때리는 그녀'에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황선홍은 졸지에 '개감독'이 됐다. 지난달 23일 방송에서 황 전 감독의 얼굴 아래엔 '선수에게 한 수 배운 개감독'이란 자막이 깔렸다. 황 전 감독이 골키퍼가 골라인 밖에서 공을 잡아 반칙을 받는 맥락을 놓친 뒤 주위에 있던 선수가 그 상황을 알려주고 난 뒤 붙은 자막이었다. 황 전 감독은 이 방송에서 개그우먼들로 구성된 '개벤저스'(개그우먼+어벤저스)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개벤저스' 감독을 '개감독'으로 뚝 잘라 조롱하는 뉘앙스를 강화한 것이다.
김교석 방송평론가는 "유튜브 콘텐츠의 선정적이고 성차별적인 자막을 지상파 예능 제작진이 유행처럼 좇고 있기 때문"이라며 "힙합 프로그램에서 래퍼가 랩이 엉킬 때 하는 '가사를 전다' 등의 표현은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비하 표현으로 들릴 수 있고, 지상파라면 이를 걸러줘야 하는데 이런 기능이 전혀 작동이 안 되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
본보가 지상파 3사 예능 심의 위반 추이를 조사한 결과, 2020년 심의 위반으로 방심위에서 경고 등 제재를 받은 건수는 64건으로, 2017년 17건보다 3배 이상 많아졌다.
선정적인 자막에 대한 우려는 커지고 있지만, 마땅한 규제 강화 방법이 없는 게 문제다.
방심위 관계자는 "방송 관련 시청자 민원이 1~6월 7,600건을 넘어섰다"며 "하지만 심의위 구성이 안 돼 심의 및 의결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난처해했다. 지상파에서 선정적 자막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제작진 외 외부인을 포함한 방송 전 모니터링이 강화돼야 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석현 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 팀장은 "지상파 내부 심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의문"이라며 "글로 시각화되는 자막은 유포되기 쉬워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만큼 더 꼼꼼한 사전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