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에서 중국과의 긴장관계를 유지 중인 필리핀이 대(對)중 견제책의 하나로 ‘바다의 천사’(여성 해경)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을 취하고 나섰다. 중국 선박을 향해 여성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경고방송을 함으로써 갈등 심화를 막겠다는 의도다. 필리핀 당국은 이번 조치가 ‘여성 역할 확대’라는 점에서 성평등까지 실현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오히려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필리핀 해안경비대가 경고방송 임무를 맡게 될 여성 무선 담당자 81명을 임명했다고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필리핀 당국은 이들을 ‘바다의 천사’라고 부르면서, 남중국해의 필리핀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침범하는 중국 선박을 상대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레오폴드 라로야 해안경비대 부대장은 “바다의 천사가 남중국해의 평화를 만드는 질서의 목소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필리핀 해안경비대의 이번 조치는 올해 4월 중국과의 영유권 다툼이 있는 남중국해 사비나 모래톱 인근에서 여성의 경고방송이 효과를 봤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당시 여성 해경이 경고방송을 하자 중국 선박 7척이 아무런 항의도 없이 순순히 EEZ를 빠져나갔다. 그간 해경의 경고방송이나 외교부 차원의 항의엔 아랑곳없이 버티기만 했던 중국 선박을 생각하면 이례적이었다. 지난 3월부터 중국 선박 220척이 필리핀 EEZ에 정박해 골머리를 앓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이에 찬사를 보낸 뒤, 경고방송을 전담할 여성 해경 임명을 지시했다.
필리핀 당국은 바다의 천사가 중국과의 긴장 관계를 온화하게 풀어내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로니 가반 해안경비대 소장은 지난달 29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바다의 천사들은 아시아 문화에 있는 아내와 어머니의 권위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날 한 해안경비대 관계자도 WP에 “여성 담당자들은 엄마가 아이를 달래거나, 아내가 남편을 안심시키는 목소리를 갖고 있다”며 임명 이유를 설명했다.
더불어 바다의 천사 프로젝트는 여성 해경들에게 기회를 부여해 성차별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는 게 필리핀 정부 주장이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만 강화할 뿐이라는 이유다. 장 엔시나스 프랑코 필리핀 딜리만대 (정치학) 교수는 “여성을 평화적 협상가로만 규정하는 건 해경 내에서 여성의 존재를 훼손하는 조치”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