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사건이나 혐오범죄 뉴스를 접하다 보면, 같은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일이 왜 생기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때가 많다. 이럴 때 근대 이전 역사를 살펴보면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지난 6월 19일에 쓴 글에서, 최근 공군 성폭력 사건을 비롯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직장 성폭력 사건의 원인 중 하나로 여성들을 '동료 노동자'가 아니라 '관기(官妓)'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지적했다.
이어서 쓴다. 조선 시대 정도가 아니다. 현재 벌어지는 각종 성폭력 사건의 바탕에는 가부장·남성의 권력 행사를 당연시하는 고대인의 '망탈리테'(집단적 사고방식)가 있다. 자, 이번에는 함무라비 법전 이야기다.
함무라비 법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문법이 아니다. 현재까지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함무라비 이전에 다른 법전이 적어도 네 번은 더 제정됐다. 기원전 2350년경에 우루카기나가 만든 법전, 기원전 2100년경의 우르남무 법전, 기원전 2000년경의 리피트 이슈타르 법전 그리고 기원전 1900년경의 에슈눈나 법전. 그런데 기원전 1750년경에 제정된 함무라비 법전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당시에 있었던 다른 고대 법전보다 뛰어난 법전이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제가 있을 정도로.
한편에선 함무라비 법전은 고대의 야만적인 법전이란 오해를 받기도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lex talionis)' 때문이다. 탈리오 법칙은 가해자에게 동일한 보복을 하게 하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을 말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기 전, 범죄에 대한 형벌은 피해자나 피해자가 속해 있던 집단이 가해자와 가해자가 속한 집단에 보복하는 형태로 행해졌다. 보복의 범위나 대상에 제한이 없었기에 가족 간, 씨족 간 무한 보복의 악순환이 이어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탈리오 법칙은 보복의 대상을 제한해 가해자에게만 보복하게 하고, 보복의 범위도 피해자가 입은 피해의 범위까지만으로 제한했다. '눈에는 가해자 당사자의 눈만'이란 기준은, 그 시대로서는 매우 진보한 법이었다.
탈리오 법칙은 계급에 따라 달리 적용됐는데, 이 점에서도 오해를 받는다. 법전 제 198조와 202조를 보자. 어느 귀족이 같은 귀족의 눈을 멀게 하면 가해자의 눈도 멀게 했지만, 평민의 눈을 멀게 하면 벌금만 낸다. 노예의 경우는 벌금이 평민의 반값이었다.
여기서 계급 차별보다 현실적 상황을 고려한 점에 더 주목하자. 대개 귀족은 재산이 많으므로 눈을 잃어도 생계에 지장이 없다. 그러니 귀족끼리 상해 범죄가 발생하면 '눈에는 눈'이다. 반면 가난한 평민이 눈을 잃었을 경우는 가해 귀족의 눈 대신 돈을 받게 해 주는 편이 낫다. 가난한 사람들은 몸으로 일해서 먹고살아야 하니 상해를 입으면 앞으로 생존이 막막해지지 않는가. 가해 귀족의 눈을 멀게 해 복수를 하는 것보다 가해자로부터 손해 배상을 받게 해 주는 편이 생활에 도움이 되니 합리적이다.
알고보니 함무라비 법전이 꽤 진보적이었고 합리적이었지만, 그건 그 시대를 감안한 평가다. 현재 함무라비 법전을 합리적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부장의 권리를 규정한 부분은 3,75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다.
함무라비 법에 의하면, 남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처벌을 처자식, 하인, 노예가 대신 받도록 할 수 있다. 법전 제229조와 230조를 보자. 건축업자가 부실 공사를 한 것 때문에 건물이 무너져 집주인이 죽으면 건축업자는 사형당한다. 그런데 집주인의 아들이 죽으면 건축업자가 아니라 아들이 대신 사형당한다. 탈리오 법칙이 정확히 적용됐다. 처자식은 가부장의 재산이기 때문에 똑같이 재산인 아들을 잃는 벌을 받았으니까.
이렇게 처자식을 가부장의 재산으로 여기고 가부장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원칙은 간통죄나 강간죄에도 적용된다. 함무라비 법전 제143조에는 아내가 간통을 하면 물에 던져 익사시킨다고 적혀 있다. 반면 결혼한 남자가 아내를 배신하고 간통했을 경우에 대한 처벌은 법전에 없다.
간통죄는 아내에게만 해당된다. 여자는 남자의 재산이므로 주인인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충실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남편에게는 그런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는 강간당한 여성이 아니라 그 여성의 남편이나 아버지, 주인인 가부장이다. 이웃 남자의 재산에 손해를 입혔기 때문에 남편이 있는 여자를 강간한 남자는 엄벌을 받는다. 함무라비 법에 의하면 사형.
이제 무서운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 자신의 친딸을 강간한 아버지는 함무라비 시절에 어떤 벌을 받았을까? 강간범은 사형이 원칙인데 딸 강간범은 사형당하지 않았다. 제154조에 의하면, 도시 밖으로 추방당하는 벌을 받았다. 왜 이렇게 약한 벌을 받을까? 그것은 자신의 재산인 딸을 범했기 때문이다. 다른 가부장의 재산에 손해를 입힌 것이 아니니까 남의 아내나 딸을 범한 것보다 훨씬 가벼운 벌을 받는 것이다.
바로 이런 고대의 법에 기반한 사고방식이 현재까지 이어진다. 친딸, 의붓딸, 딸과 같은 입장에서 자신의 보호나 지도를 받고 있는 어린 여성을 성폭력하는 남성들에게. '내 재산인 처자식이니까 내 맘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이런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법을 개정해 형벌을 강화해도 소용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잠깐, 이 부분에서 친부 성폭력을 거론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질 분들을 위해 통계를 인용하겠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19년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성폭력, 성매매, 디지털성범죄 등) 피해자 수는 3,622명으로 이 중 10.3%(372명)가 '가족'에게 피해를 봤다. 가족 가해자 중 친부가 137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의부가 101명이었다.
이 통계를 봐서도 알 수 있듯, 딸을 성폭력 하는 남성은 많다.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악마나 짐승이 아니다. 지금도 '내 새끼 내 맘대로 못 하냐'며 자식을 폭행하는 것을 가부장의 권리로 아는 아버지가 꽤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버지 성폭력은 알려진 사실보다 훨씬 많이 발생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폭력은 '성'행위가 아니라 '폭력'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대 함무라비 시절 사람들 같은 망탈리테는 성추행범들의 변명에서도 드러난다. 어린 여성을 성추행하는 나이 든 남성들이 한결같이 하는 변명이 있다. "딸처럼 여겨서 그랬다"라는 말. 가장 유명한 케이스로 2014년 박희태 전 국회의장 성추행 사건이 있다. 당시 박씨가 "손녀 같아서 귀엽다는 표시는 했지만 정도를 넘지 않았다"라고 해명하자 사람들은 "너는 니 친손녀 귀여우면 가슴 만지냐?"라며 분노했다. 이 외에도 뉴스를 검색해 보면 이런 사건과 이런 변명이 너무도 많다. 왜 이들은 한결같이 "딸처럼 여겨서 그랬다"라고 말할까?
잘못한 사람은 변명할 때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말하려 든다. 어린아이들도 "접시가 깨졌어요"라고 말하지 "내가 접시를 깨뜨렸어요"라고 말하지는 않는 법. '딸같이 여겨서 했다'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말하면 용서받거나 더 가벼운 벌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서 함무라비 법전에서 아버지가 딸을 강간하는 경우에는 다른 여성을 강간했을 때보다 가벼운 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늙은 가해자 남성이 어린 피해 여성에게 '딸처럼 대해줬는데!'라며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당당히 분노하는 이유는 '내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남의 여자도 아니고 내 딸에게 한 짓이니까 심한 벌을 받을 만한 큰 죄가 아니다. 아버지가 뭔 짓을 해도 순종해야 하는데 참지 않고 고소한 딸이 더 잘못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함무라비 법전에 반영된 고대 가부장의 권력을 친딸을 성폭행하는 남성들과, '딸처럼 여겨서 그랬다'며 자신보다 어린 여성을 성추행하는 남성들의 망탈리테와 연결해서 살펴 보았다. 21세기에도 건재한 고대인의 문제적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더 할 이야기가 많다. 다음에 이어서 이야기하겠다. "2주 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