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남긴 미술작품 전시 공간 유치를 놓고 지자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특히 ‘수도권 유치 가능성’을 내비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발언이 알려지면서 수도권-비수도권 갈등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문체부는 7월 초 유치 지역 선정 방향을 발표할 예정이다.
30일 각 지자체에 따르면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직간접적으로 희망한 곳은 30여 곳에 이른다. 지난 4월 29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내부 회의에서 "별도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가 나온 뒤 두 달간 서울과 인천, 부산, 대전, 대구 등 광역자치단체는 물론 경남 의령군과 강원 평창군 등 기초자치단체,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들까지 유치전에 가세했다.
유치 명분은 다양하다. 경기 과천시는 지역 현안 해결 차원에서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나선 경우. 정부과천청사 유휴부지를 활용한 주택 공급 정책과 관련, 주민소환투표까지 치른 김종천 시장은 "청사 유휴부지 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국무총리에게 이건희 미술관 과천 건립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과천엔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다. 대전시는 옛 충남도청 부지를 활용하면 번거로운 공모 없이 미술관을 조성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충남도청 부지 소유권은 7월 중 충남도에서 문체부로 넘어간다.
이 전 회장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지역도 많다. 29일부터 이 전 회장 기증 작품 21점을 대구미술관에서 공개한 대구시는 건립 비용 2,500억 원 전액을 시가 부담하고 미술보존센터와 야외문화공간 등을 갖춘 ‘이건희 헤리티지센터’ 조성까지 내걸었다. 의령군은 삼성 창업주 이병철 전 회장의 생가를 내세우고 있고, 전남 여수시는 이 전 회장이 생전에 해안 경관을 좋아해 자주 방문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수 지역 초등학생 500여 명이 "여수에 이건희 미술관을 세워달라"는 손편지를 문 대통령과 김부겸 국무총리, 황 장관에게 보내기도 했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한 권역에서 각축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경기도의 경우 경기북부 미군 공여지에 미술관 건립을 건의했다. 하지만 수원시와 용인, 평택시 등 남부권 도시들이 개별적으로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부산시의 경우 해운대구와 동구, 중구가 앞다퉈 부지를 제공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그러나 싸움은 황 장관 발언 하나에 '수도권-비수도권 갈등'으로 비화하고 있다. 황 장관은 지난 5월 "미술관을 지방에 둘 경우 '빌바오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유치 경쟁 과열 등으로 엄청난 국고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며 “(입지 선정 문제를)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빌바오 효과는 스페인의 쇠퇴하던 공업도시 빌바오가 구겐하임미술관 유치를 통해 예술도시로 부상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특히 황 장관 발언 이후 문체부가 서울시에 ‘종로구 송현동 부지에 미술관 건립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지자체들은 들고일어났다. 황 장관이 수도권, 그중에도 서울을 염두에 두고 일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같은 국민의힘 소속으로 제1, 2도시를 이끌고 있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산시장 입장도 첨예하게 엇갈린다. 김형기 이건희 미술관 대구유치시민추진단장은 "지방 분권을 강조하는 대통령이 결단 내려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김 단장은 황 장관 발언 이후 ‘비수도권에 건립해야 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지자체들이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뛰어든 이유는 경제 효과다. 빌바오 효과를 통한 방문객 증가, 지역경제 활성화, 지역 발전 등을 기대하고 있다. 각 지자체 입장에선 이 정도 규모의 자체 프로젝트가 불가능하다. 특히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단체장 입장에서는 치적으로 내세우기에 이만한 프로젝트가 없다는 판단도 작용한다. 이 때문에 ‘지자체의 과열 경쟁이 이건희 미술관 건립 취지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대전 문화예술계의 한 인사는 "문화예술 기반이 수도권 중심이라 지역 인재도, 기업도 수도권으로 몰리는 게 기정사실"이라며 "이건희 미술관이 이런 흐름을 바꾸는 변곡점, 국토 균형발전의 발판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