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착취범 최찬욱의 신상이 공개됐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성행위를 하는듯한 자세와 언어 등을 명령하는 주인이었고 소위 주인-노예 플레이어이며 성착취물 제작자이다. 그의 범행은 주로 여성을 성착취의 대상으로 둔 기존의 성범죄 유형과 사뭇 다르다. 피해자는 모두 남성이었고 미성년자였다. 그러나 자신이 다루기 쉬운 만만한 약자를 대상으로 범행을 했다는 것과, 신고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성범죄의 전형이기도 하다. 동시에 성범죄 피해에 성별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것도 보여준다.
언론에 공개된 최찬욱의 모습은 논란을 남겼고 그의 말은 몇 가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졌다. 우선, 그는 스스로를 착한 주인이라 칭하였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이는 피해자들에게 지금 발생하는 일이 범죄가 아니라 놀이라고 세뇌하였다는 것. 둘째, 스스로에게도 단순한 놀이라고 세뇌하며 죄책감을 덜어왔다는 것. 셋째, 소셜네트워크상에는 정말 최악의 주인-노예 플레이어들이 많다는 것이다.
범죄학에서 사회학습이론은 범죄는 친밀한 집단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학습되는데, 범죄에 대한 기법이 아닌 불법 행위에 대한 변명과 정당성을 학습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범죄로 인한 보상의 경험이 범죄를 지속하게 한다고 본다. 그는 노예 플레이를 시작하면서부터 이것은 범죄가 아니라는 중화기술이 작동시켰고, 욕구 충족이라는 보상의 강화가 범행의 지속을 낳았다. 사실 주인-노예 플레이는 온라인상에서 쉽게 목격되는 관계이지만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 그는 5년 동안 범행을 지속했고 붙잡히지 않았다.
둘째, 그는 “더 심해지기 전 어른들이 구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 당당함이 마치 대권 도전 선언 자리 같다며 사람들은 공분하였다. 그러나 그 말 속에 진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호기심으로 범행을 시작하였지만 굉장한 보상이 주어졌다. 이후 공인중개사로 일하면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사회생활에 애착을 갖고 참여하게 되었지만 퇴근 이후에는 범죄의 시간을 보냈던 최찬욱은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고 멈추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뇌가 성착취물에 중독되어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는 것이다. 붙잡히는 순간, 분명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 마음속에는 ‘드디어 이 생활이 끝났구나’라는 안도감도 있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오랫동안 붙잡히지 않았던 범죄자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중독은 뇌의 브레이크 기능이 망가진 상태이기에 사실 자력으로 제동이 안 된다.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그 나름의 발버둥과 그 중독 세계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최찬욱 사건은 범죄란 것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병리적 성향과 사회의 방조라는 상호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그렇다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제 경찰은 소셜네트워크상의 악마 주인들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신고가 없었다는 변명 말고, 주인-노예 플레이어들에게 형사사법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범죄자에게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범죄의 지속을 의미한다. 처벌의 확신성을 보여줘야 한다. ‘피해자에게 미안하다’,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잡혔으니 들을 수 있는 말임을 명심해야 한다.
법조계는 성범죄 적용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실 공간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성범죄 정의에 갇혀서는 안 된다. 온라인상에서의 성을 매개로 한 끔찍한 착취 행위, 과연 성범죄로만 볼 수 있는가? 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착취’가 중요 키워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론 공개로 놀라는 사람과 온라인상에서 방관했던 사람이 과연 다른 사람이었던가? 착취당하는 누군가의 인권을 못 본 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방관은 범죄자에게 붙잡히지 않는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마지막으로, 최찬욱 사건은 교육이 뒷받침되지 않은 호기심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다. 범죄에 대한 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현실적인 범죄 교육이 있어야 호기심으로 발을 담그는 10~20대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막을 수 있다. 그들의 브레이크마저 고장 나버리면 교육도 무용지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