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영화 ‘버킷리스트’. 암에 걸려 6개월 시한부 삶을 사는 잭 니컬슨과 모건 프리먼이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곱 번째 목록, 그것은 ‘몸에 영구 문신을 새기는 것’이다.
△가수 에일리의 최신곡 ‘타투’의 일부. “영원할 순 없을까/이 짙어진 흔적들/널 내 안에다 새길래/아픔마저 허락해” 그룹 노브레인의 같은 제목 노래 가사 일부. “이제 빛나는 몸에 꿈을 새겨/너의 긴긴 잠을 깨워줄/지워지지 않는 파라다이스”
△빚더미에 올라앉아 힘든 시절을 보낸 연예인 이상민. 그는 척추를 따라 등 아래까지 ‘표풍부종조 취우부종일(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이라는 글귀를 새겼다. ‘회오리는 아침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자 도덕경에 나온다. 그는 확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미국의 9·11 테러 현장에서 살아남은 소방관들은 순직한 동료들의 이름을 몸에 새기고 다닌다. 동료에 대한 영원한 헌사이자 자신의 직업에 대한 다짐이다.
△공익광고의 천재로 불리는 이제석. 오른쪽 가슴 부위를 사각형 모양 점선으로 문신을 했다. 그 아래에 ‘장기/조직 기증을 희망합니다’라는 글과 가위를 새겼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다 입은 옷을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있지만 기부함에 넣을 수도 있다. 몸이란 죽을 때 벗고 가는 옷과 같다.”
△소설가 천운영의 문단 데뷔작 ‘바늘’은 문신을 새겨주는 상처 입은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는 말한다. “육체와 그 위에 새겨진 글귀 사이에 공존하는 어떤 것. 그것은 아름다운 상처, 혹은 고통스러운 장식이다.”
△서양과 달리 신체발부를 따지는 유교권에서만 문신은 부정적이었다. ‘경을 칠 놈’이라는 욕이 있다. 묵형(墨刑), 경형(黥刑)이다. 죄인의 이마나 몸에 먹으로 죄명을 새기는 형벌이다. 왕조시대 중국과 한국에서 문신은 ‘낙인’이었다.
△‘문신(文身)’을 무늬 ‘紋’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많다. 文자의 갑골문을 보면 사람의 가슴에 문양이 그려져 있다. 글월 文자의 본래 의미는 ‘몸에 새기다’였다.
지금 인스타그램에 영어로 ‘tattoo’라고 치면 무려 1,000만 개 이상의 사진이 뜬다. 한글로 ‘타투’라고 치면 380만 개 이상이다. K-팝만 유명한 게 아니다. ‘K-타투’도 있다.
그런데 문신은 현행법상 ‘의료행위’로서 의사만 할 수 있다. 하지만 장미나 나비를 그려주거나, 연인의 이름을 새겨준다는 의사는 눈 씻고 봐도 없다. 그럴 재능도 없다. 한국은 타투가 불법인 유일한 나라다.
얼마 전 류호정 의원이 타투 합법화 퍼포먼스를 했다. 그런 거 하라고 국회의원이 있는 거라는 그의 당돌한 말이 난 좋았다.
육체의 엄숙주의는 전복된 지 오래다. 내 몸은 내 것이지, 수지부모(受之父母)가 아니다. 몸은 패션이고 캔버스이자 마음의 인화지다. 그 몸에 무늬를 아로새기는 행위는 창의적 예술이자 나의 정체성에 대한 내밀한 커밍아웃이다. 스스로에 거는 주술이자 정신의 부적이다. 기억, 정표, 상처, 신념, 맹세, 존재를 바늘의 고통으로 치환하는 행위다.
(헤나나 스티커 말고) 각인은 지울 수 없고 세월에 풍화되지도 않는다. 문신은 지울 수 없기에 하는 거다. 변화무쌍한 내 마음에 수갑을 채우는 행위다. 그걸 어떻게 언제까지 법이 막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