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에게 여권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입력
2021.07.0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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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난센여권


프리티오프 난센(Fridtjof Nansen, 1861~1930)은 노르웨이 탐험가이자 과학자, 외교관이다. 20대 때부터 모험을 즐겨 스키로 그린란드 빙원을 누볐고, 직접 설계한 탐험선 프람(Fram)호를 타고 북극점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의 명사였다.

그의 모험은 해양과 극지 생명체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수단이기도 했다. 26세에 인체 중추신경계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오슬로대학(당시 왕립 프레데리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딴 그는 모교에서 해양생물학을 가르쳤다. 1905년 노르웨이 독립 당시 그는 왕정을 지지해 신임 국왕에 의해 외교관에 임명됐고, 1920년 1차대전이 끝난 뒤 국제연맹의 노르웨이 대표를 맡았고, 이듬해 국제연맹 난민고등판무관이 됐다.

세계대전과 이어진 내전으로 인해 숱한 난민이 생겨났다. 그들에겐 국적을 입증할 여권도, 여권을 발행해줄 국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국경 자체가 요동치던 때였다. 거기다가 1917년 혁명으로 탄생한 러시아 정부는 내전 중 해외로 피란(망명)한 난민 80여 만명의 시민권을 1921년 박탈했다.

모든 혼란이 난센의 숙제였고, 그가 제시한 해법이 '난센 여권(Nansen Passport)'이라 불리는 임시 여권이었다. 그는 고등판무관 권한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회의(1922. 7. 3~7.5)를 개최해 합의를 이끌어냈고, 국제연맹의 난센여권을 발행했다. 국가가 발행한 여권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 난센여권은 1933년 폐지될 때까지 약 45만 명에게 발행돼 난민들의 여행과 이민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당시에도 난센여권 소지자가 그리 환영 받지는 못했다. 난센은 "난민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그들이 값진 자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국제사회를 설득했다. 그는 1922년 노벨평화상을 탔고, 상금 전액을 러시아 기근(1921~22) 지원사업에 기부했다. 연맹을 계승한 국제연합(유엔)은 1954년 '난센 난민상'을 제정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