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또 다른 지옥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24년간 성폭행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삶을 끝내기 위해, 아이들만큼은 똑같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살인자가 되기를 택했다. 과거엔 계부였고 현재는 네 아이의 아빠인 남편을 향해 총을 겨눴다. 살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고, 감옥에 갇혔고,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끔찍했던 세월 앞에서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냉정한 법도 이번만큼은 따뜻한 품을 내어줬다.
25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에 따르면 프랑스 동부 사온에루아르 지방법원은 계부이자 남편인 다니엘 폴레트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기소된 발레리 바코(40)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고 그중 3년에 대해 집행을 유예했다. 재판을 받기 전 이미 구치소에서 1년간 수감 생활을 했던 바코는 선고와 동시에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
프랑스 법에는 학대당한 여성의 자기 방어에 관한 조항이 없기 때문에 바코는 최대 종신형까지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바코가 오랜 세월 겪어야 했던 두려움을 인정한다고 했고, 앞서 검사 측도 바코를 감옥으로 돌려보내선 안 된다는 의견을 냈다. 판사의 선고에 법정 방청석에선 기쁨의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바코도 충격과 안도감에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바코는 2016년 25세 연상인 남편 폴레트를 총으로 쏴 죽였다. 바코는 24년 전인 12세 때부터 폴레트에게 성폭행과 구타, 학대를 당했다. 당시 폴레트는 남편이 아니라 계부였다. 바코의 어머니는 딸이 겪는 참혹한 일을 알고도 내버려 뒀다. 폴레트는 1995년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2년 6개월간 옥살이를 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바코를 성폭행했다.
바코는 17세에 첫 임신을 했고 네 아이를 낳았다. 급기야 폴레트는 의붓딸인 바코를 아내로 삼았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폴레트는 수시로 아이들을 때렸고, 바코에게 성매매를 강요했다.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면 죽이겠다고 권총으로 협박하기도 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바코는 폴레트가 19세 딸에게까지 검은손을 뻗칠까 두려웠다. “폴레트를 죽이는 것만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내던져서라도 아이들을 구해내기로 결심했다.
바코는 지난달 출간된 회고록 ‘모두 알고 있었다(Tout le Monde Savait)’에서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을 폭로했다. 그는 책에서 “나는 단지 나 자신과 내 아이들을 보호하고 싶었다”며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고 썼다. 아이들도 법정에서 바코의 무죄를 주장했다.
바코를 지지하는 인권단체가 주도한 ‘석방 청원서’엔 무려 71만5,000명이 서명했다. 피해자 지원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미국 CNN방송은 “이 사건이 프랑스 특유의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속에 오랜 세월 감춰져 있던 근친성폭력과 가정폭력 문제를 환기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했다.
재판이 끝나고 법원 밖으로 나선 바코를 시민들이 눈물과 환호로 따뜻하게 반겼다. 바코는 “법원과 나를 지지해준 모든 분께 감사하다”며 “이제는 다른 모든 여성과 함께 학대에 맞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라고 말했다. 바코의 변호인은 “비로소 정의가 실현됐다”며 “바코는 아이들 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