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SKB)가 맞붙었던 망 사용료 소송이 SKB의 승소로 마무리되면서 향후 통신-인터넷 생태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점쳐지고 있다. 그동안 '망 중립성'이란 가치를 내세우고 어떠한 비용도 지불하지 않았던 넷플릭스나 구글은 이제 통신사에 별도의 비용을 지불할 가능성이 커졌다. 반면 통신사는 엄청난 접속량(트래픽)을 차지하면서도 '무임승차'해왔던 콘텐츠 업체(CP)에게 정당한 사용료를 받게 됐다.
2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부장 김형석)는 넷플릭스가 SKB를 상대로 제기한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을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재판부가 넷플릭스를 포함한 CP가 통신사에 지불할 채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결국 CP가 가입자에게 콘텐츠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트래픽을 쓰는 만큼 통신사에 망 사용료를 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재판부는 넷플릭스에서 주장한 망 중립성 원칙은 이번 사안과 무관하다고 봤다. 망 중립성 원칙은 '통신사가 네트워크상에서 모든 콘텐츠를 차별 없이 다뤄야 한다'는 개념으로 인터넷 보급 초창기에 콘텐츠 업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시됐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동영상, 게임, 클라우드 등에 따라 트래픽이 급증하면서 2018년 미국에서도 망 중립성 원칙이 폐지된 바 있다.
소비자가 이미 통신요금을 지불한 만큼 CP가 다시 비용을 내는 것은 '이중청구'라는 넷플릭스의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대근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는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내가 통신사에 돈을 냈다고 상대가 통신사에 돈을 내지 않아도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라며 "이용자와 CP 모두 이용자의 지위에서 각각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이번 판결에 따라 해외 사업자란 이유만으로 망 사용료를 회피해왔던 역차별 문제도 해소될 전망이다. 네이버, 카카오, 왓챠 등 국내 콘텐츠 사업자는 매년 수백억 원 규모의 망 이용 대가를 통신사에 지급하고 있다. 대가를 받은 통신사는 해당 업체를 위해 인터넷전용회선, 인터넷데이터센터(IDC), 캐시서버(CDN)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실 넷플릭스도 국내를 제외한 미국, 프랑스 등의 국가에서는 현지 통신사에게 망 사용료 명목의 일정 비용을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법원이 망 사용료 자체에 대해선 "당사자들의 협상에 따라 정해질 문제"라고 판단한 만큼 이를 둘러싼 논란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넷플릭스도 "법원의 판결문을 검토하여 향후 입장을 말씀드리겠다"며 "항소 여부도 판결문을 본 뒤 판단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SKB와 넷플릭스는 다시 망 사용료를 두고 재협상을 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재판 결과에 따라 통신사와 해외 CP 간의 역학관계 변화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SKB가 넷플릭스에 상당한 비용을 받아낼 수 있게 된다면 KT, LG유플러스 역시 넷플릭스에 재협상을 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넷플릭스와 마찬가지로 통신사에 별도의 망 사용료를 내지 않고 있는 구글에도 정당한 대가를 요청할 것으로 점쳐진다. 국내 진출을 앞두고 있는 디즈니플러스 역시 이번 재판에 따라 국내 통신사와의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됐다.
하지만 해외 CP들이 망 사용료로 내야 하는 비용만큼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콘텐츠 업계 관계자는 "구글, 넷플릭스가 국내에서 압도적 시장 지배력을 갖고 있는 만큼 비용을 높이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라며 "이번 재판 결과가 소비자들에게 달갑지만은 않은 이유"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