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하다 지쳐" 법원까지 가려면 15단계 이상 거쳐야 한다

입력
2021.06.2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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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에 빠진 내 사건] <중> 수사 경로만 74가지
본보, 법령+실무 반영해 새 형사제도 복잡성 검증
경찰 1차 수사종결권 '견제 장치'가 절차 복잡하게
형사 변호사들조차 고소인에게 제도 설명 어려워
사건들 쌓이고 처리 속도 느려져... 피해는 국민 몫

※한국일보는 고소인 입장에서 새 형사사법시스템에서 복잡해진 사건 처리 절차를 직접 따라가볼 수 있는 '체험형 인터랙티브'를 제작했습니다. 한국일보 인터랙티브를 통해 '내 사건'이 어떻게 처리될 수 있는지 예측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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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모(46)씨는 최근 자신이 고소한 사건을 경찰에서 불송치 결정을 내렸고, 사건 기록이 검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찰은 박씨에게 불송치하기로 했다고 전화로 알려줬을 뿐 결정서를 따로 보내지는 않았다. 박씨는 "불송치가 되면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수사가 끝난 줄 알았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러나 지인을 통해 경찰의 불송치 결정으로 사건 처리가 완전히 종결된 건 아니란 얘기를 들었다. 그는 "불송치 결정 후에도 검찰에서 90일 동안 경찰 수사기록을 검토한다는 걸 알고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에서 기록 검토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절차를 거쳐야 검찰 조사에 응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몰랐다. 박씨는 "내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고 싶은데 제대로 알려주는 곳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너무 복잡해서 예측 불가능한 시스템

올해 1월 1일부터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새로운 형사사법시스템이 도입됐지만, 고소인들은 수사 절차를 예측해 다음 단계를 대비하기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바뀐 시스템이 너무 복잡해서 제도 자체를 이해하기 힘든 탓이 크다.

새로운 형사사법시스템이 얼마나 복잡하길래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 한국일보는 검·경 수사권 조정 후 개정되거나 새로 만들어진 법령·규칙(형사소송법 검찰청법 검사사법경찰관상호협력수사준칙 검찰사건사무규칙 경찰수사규칙)과 검·경 수사 실무를 바탕으로 발생 가능한 수사 경로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를 통해 고소 사건이 종결되거나 법원 문턱에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를 따져봤다.

경우의 수를 분석한 결과, 고소인 앞에 놓인 수사 경로는 74가지에 달했다. 이는 △한 명의 국민이 △하나의 혐의가 적용된 사건을 수사기관에 고소하고 △검찰의 보완수사 요구가 두 번을 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의 결과다. 사건이 여러 혐의로 쪼개질 경우 발생 가능한 수사 경로는 훨씬 많아진다.

고소한 사건이 종결되든 혹은 기소되든, 마지막 관문까지 거쳐야 할 길도 '산 넘어 산'이다. 경찰 수사를 거쳐 검찰의 기소로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가려면 '15단계 이상'을 거쳐야 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수사권 조정 이전엔 수사 경로는 10가지 정도, 기소되기까지는 5단계 정도만 거치면 됐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수사 경로는 7배 이상 많아졌고, 수사 단계는 3배 이상 복잡해졌다.

수사종결권 쥔 경찰 견제 장치로 복잡해져

수사 경로가 많아지고 결론이 나오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이유는 검·경 수사권 조정의 뼈대인 '검찰 직접 수사 축소'와 '경찰 권한 확대' 때문이다.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은 6대 중대범죄만 수사할 수 있고, 나머지 범죄는 기본적으로 경찰 몫이 됐다. 경찰에는 혐의 없다고 판단되면 자체적으로 사건을 끝낼 수 있는 '1차 수사종결권'이 부여됐고, 검찰엔 경찰에 대한 사법통제관 역할이 주어졌다.

이처럼 경찰의 재량권이 커지면서 견제 필요성도 부각됐다. 일상에서 접하는 상당수 사건을 경찰이 수사하는 상황에서 사건을 매듭지을 수 있는 권한까지 갖게 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찰 견제를 위한 장치가 이것저것 만들어지면서 수사 절차가 '한없이' 복잡해졌다는 데 있다. 고소인 입장에선 수사기관에 합법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여러 권리들이 생겼지만, 사건 처리 기간은 더 길어진 셈이다.

실제로 74가지 수사 경로 중 72가지는 모두 경찰 수사 이후로 집중됐다. 나머지 2가지 경로는 모두 6대 중대범죄에 해당하는 사건을 고소해 검찰이 직접 불기소 또는 기소 여부를 판단하는 경우였다. 경찰에 1차 수사종결권이 없고 검찰 지휘를 받았던 과거 형사사법시스템과의 결정적 차이는, 경찰에 대한 견제 장치 유무였다.

경찰 불송치 결정에 고소인은 이의신청으로 견제

수사권 조정으로 새롭게 설계된 장치들은 주로 경찰의 '불송치 결정'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경찰이 고소 사건을 '혐의 없음'으로 불송치한다는 것은 사건을 검찰로 넘기지 않고 경찰이 자체적으로 종결한다는 의미다. 수사를 개시한 기관이 종결까지 했기 때문에 경찰 판단이 맞는지 검증하는 절차가 필요했고, 그 역할을 검찰이 맡았다. 검찰이 경찰로부터 불송치 결정서와 수사기록을 넘겨받아 '90일 동안' 검토하도록 규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검찰은 경찰의 불송치 결정이 '위법하고 부당하다'고 판단하면 '재수사 요청'을 할 수 있다. △핵심 증거에 대한 확인이나 수사가 미진한 경우 △피의자 변명에 구체적으로 부합하는 증거가 없는 경우 △경찰이 범죄 구성요건과 판례를 잘못 인용하는 경우 등이 위법하고 부당한 불송치 결정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경찰은 검찰의 재수사 요청을 거부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재차 수사한 뒤 송치와 불송치 가운데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고소인 역시 경찰의 불송치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사용 기한의 제한은 없지만, 이의신청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 결정 이후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고소인이 이의신청할 경우 사건은 예외없이 검찰로 넘어가게 돼, 검찰이 직접 수사를 할 수 있게 된다. 경찰 입장에선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재수사 보완수사 이의신청 맞물리면 15단계

경찰에 대한 검찰의 보완수사 요구도 절차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보완수사는 경찰이 고소 사건을 수사해 혐의가 인정돼 송치할 경우 주로 발생한다. 검찰은 △추가 범죄 혐의가 의심되는데 수사를 안 한 경우 △피의자가 혐의 부인하는데 관련 증거 조사를 미미하게 한 경우에 경찰한테 수사를 더 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경찰은 보완수사 후 송치 또는 불송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처럼 △경찰의 송치·불송치 결정 △검찰의 재수사 요청·보완수사 요구 △고소인의 이의신청까지 맞물려 수사가 진행될 경우 15단계 이상의 단계를 거쳐야 사건이 마무리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6대 중대범죄가 아닌 경우 → ②경찰 고소 및 수사 → ③경찰 불송치 결정 → ④검찰에서 90일 기록 검토 → ⑤불송치 결정 위법부당 판단 → ⑥경찰에 재수사 요청 → ⑦경찰 불송치 결정 유지 → ⑧고소인 이의신청 → ⑨검찰로 사건 자동 송치 → ⑩검찰 수사 → ⑪검찰 보완수사 요구 → ⑫경찰 보완수사 후 송치 → ⑬검찰 수사 → ⑭검찰 기소 → ⑮법원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검찰의 보완수사 요구는 횟수 제한이 없어, 사건이 수차례 더 경찰과 검찰을 오갈 수 있다.

변호사 "고소인에게 수사 진행 과정 설명 어려워"

이 같은 복잡한 사건 처리 절차 때문에 형사사건을 주로 다뤄온 변호사들조차 현재의 형사사법시스템에는 혀를 내두른다. 한국일보가 지난달 25일부터 한 달 동안 형사사건 담당 변호사 5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수사권 조정 후, 전보다 사건 처리 과정이 복잡해졌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한 변호사는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 48%, '매우 그렇다' 16%로 5명 중 3명은 바뀐 시스템이 훨씬 복잡해졌다는 답을 내놓았다.

변호사들은 수사 과정과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도 토로했다. '고소인에게 경찰 및 검찰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정확히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냐'는 질문에 42%가 '그렇다'고 답했다. 또 5명 중 1명은 수사 경로를 파악하기 힘들다고 밝혀,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들조차 현재의 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서울 서초동에서 활동하는 10년 경력의 한 변호사는 "새 제도가 시행된 지 6개월이나 지났지만 검·경 사이에서 사건이 오가는 과정을 파악해 제대로 대응하는 변호사는 많지 않다"며 "검찰과 경찰 출신 전관들이 현직 후배들에게 알음알음 연락해 각 단계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물어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검찰 오가며 느려지는 사건 속도

수사 서비스 이용자 입장에선 사건 처리 속도가 느려지고 있는 점이 가장 큰 불만이다. 대검이 최근 발표한 검·경 수사권 조정 3개월(1~3월) 통계를 보면,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송부된 사건은 22만7,241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9만874건)과 비교해 78.1% 수준에 그쳤다. 이는 검찰로 넘기지 않고 경찰이 쥐고 있는 사건이 수사권 조정 이전보다 늘었다는 뜻이다.

경찰이 송치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 요청도 가파르게 증가(1월 559건→2월 916건→3월 1,377건)하고 있다. 경찰 송치 사건에 대해 검찰이 보완수사를 요구한 사건도 올해 1월 2,923건에서 2월 5,206건, 3월 6,839건으로 매달 큰 폭으로 증가했다. 보완수사 요구가 늘어나면, 경찰 단계에서 사건이 한 차례 더 머무르기 때문에 신속한 수사는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검찰 출신의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는 "검찰이 보완수사 요구를 하면 경찰이 사건을 다시 송치하는데 3개월 가까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며 "이렇게 되면 고소인 입장에선 사건 처리가 지연되는 것이고, 최종 결론이 나오기까지 1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찰서에 쌓이는 사건들... 눈치 보는 고소인들

결국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서에는 사건들이 점점 쌓여가고 있다. 서울지역 한 일선경찰서 간부는 "최근 자체적으로 미제 사건을 조사했는데, 접수된 지 3개월 이상 된 고소·고발 사건은 카운팅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며 "6개월 이상 장기 미제 사건의 경우 사이버팀은 1인당 40~50건, 경제팀은 1인당 10~20건에 달했다"고 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다. 인터넷 중고물품 사기 사건 피해자인 강모(38)씨는 "검찰에서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한 지 두 달이 돼가지만 별다른 소식이 없다"며 "담당 경찰에게 연락해 언제 결론 내릴 거냐고 계속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속이 타들어간다"고 말했다. 강씨는 "고소인 입장에선 너무나 중요한 사건인데, 수사기관에선 기계적 잣대로만 사건을 처리하는 것 같다. 수사기관 눈치를 보게 되는 상황에 너무 화가 난다"고 토로했다.

이상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