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위축됐던 화장품 업계가 중국 시장을 중심으로 해외실적을 회복하고 있지만 묘한 긴장감도 감지된다. 중국 소비자 수준이 높아지면서 예전처럼 K뷰티 열풍에만 기대 장사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매출로 보이는 성장세가 무색하게 중국 내 한국 화장품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도 나온다. 한국무역협회가 집계한 지난해 중국의 한국 화장품 수입 비중은 18.8%로 전년 대비 4.2%포인트 낮아졌다.
최근 중국에서 열린 상반기 최대 온라인 행사 '6·18 페스티벌' 때 화장품 업계는 모처럼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분위기다. 중국에서도 중저가 로드 숍(길거리 매장) 시대가 저물면서 화장품 업계는 럭셔리 브랜드와 품질·기능을 강조하는 고급화로 전략을 수정하기 바쁘다. 중국의 소비 주체가 글로벌 브랜드에 익숙하고 온라인 소통을 즐기는 MZ세대(1980년대 초 ~2000년대 출생자)로 바뀌자 전자상거래(e커머스) 중심으로 왕훙(網紅·인플루언서) 마케팅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27일 LG생활건강에 따르면 이달 1~20일 중국 최대 온라인몰 티몰 기준 후, 숨, 오휘 등 6개 럭셔리 브랜드 매출은 전년 대비 70% 늘어난 5억800만 위안(약 893억원)을 기록했다. 아모레퍼시픽도 럭셔리 브랜드 설화수의 자음생이 전년 대비 두 자릿수 성장을 이뤘다. 업계는 6·18 페스티벌 효과에다 코로나19로 인한 보복소비 심리로 실적이 반등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중국 시장의 위험 요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MZ세대 중심으로 애국소비를 권장하는 '궈차오(國潮)' 열풍이 일면서 화시쯔(花西子), 퍼펙트 다이어리(완메이르지·完美日記) 등 현지 브랜드가 급부상하고 있다. 이런 브랜드들은 여러 기업과 컬래버레이션(협업)으로 제품력을 높이고 자국 문화의 정통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펼친다. 자국 브랜드를 지지하는 중국 정부의 정책 기조도 애국소비를 부추기고 있다.
화장품 업계 관계자는 "최근 중국 회사들이 기술력을 키우면서 제품의 효능이 향상됐는데, 한국 중저가 제품보다 가격 경쟁력도 뛰어난 편"이라며 "브랜드 포지셔닝을 새롭게 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내 업체들은 MZ세대의 과시 욕구를 자극하는 식으로 럭셔리 전략을 펼치고 있다. LG생활건강, 아모레퍼시픽 등은 제품 포장을 고급스럽게 리뉴얼하고 백화점에 입점해 주변에 자랑하고 싶은 이미지를 만드는데 주력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비싸다고 사는 것도 아니다. 유통 채널의 다양화로 정보력이 높아지면서 중국 소비자도 성분과 효과 등을 꼼꼼하게 따진다. 유명 브랜드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던 성향도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더마코스메틱(의약+화장품) 계열의 국내 중견 브랜드 닥터자르트는 의학적 성분 함유 이미지로 6·18 페스티벌에서 매출액 1억2,000만 위안(약 210억 원)이라는 역대 최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유통 판로를 오프라인 로드숍에서 소셜미디어로 전환하고 왕훙을 이용한 라이브 방송에 진출하는 것도 불가피한 선택이다. 6·18 페스티벌에서 왕훙 마케팅을 펼친 마몽드는 전년 대비 매출이 25% 성장했고, 애경산업은 AGE 20’s(에이지투웨니스) 팩트 22만5,000개를 팔아 왕훙 효과를 톡톡히 봤다. 업계 관계자는 "콧대 높던 외국 브랜드도 중국 소비자 입맛에 맞춰 마케팅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며 "고상하게 앉아서 브랜드 정체성 지키기에만 몰두하는 게 더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