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암호화폐(가상자산) 거래소가 고객 자산을 ‘먹튀’한 것으로 추정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 금액만 우리 돈으로 4조 원에 이른다. 거래소가 해킹당한 것처럼 속인 뒤, 돈을 빼돌리는 ‘자작극’을 벌였다는 게 피해자들 주장이다. 실제 경영진이 해외로 도피하면서 의혹은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암호화폐가 제도권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생긴 빈틈을 노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23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과 암호화폐 전문매체 코인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남아공 암호화폐 거래소 ‘아프리크립트(Africrypt)’ 경영진은 6만9,000개의 비트코인을 챙겨 달아난 의혹을 받고 있다. 약 36억 달러(4조 원) 규모다. 이 거래소는 아메르와 레이즈 케이지 형제가 2019년 공동으로 설립했다.
조짐은 암호화폐 가격이 고공행진을 벌이던 두 달 전쯤 나타났다. 지난 4월 13일 당시 형인 아메르 최고운영책임자(COO)가 고객들에게 거래소 해킹 피해 사실과 함께 고객 전자지갑(월렛)과 노드(개개인의 서버)가 손상돼 모든 계정이 동결됐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러면서 그는 “사건을 당국이나 변호사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문제가 커질 경우 도난당한 자금 회수가 늦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의구심을 품은 일부 투자자들이 변호인을 고용, 구체적인 정황 파악에 나서면서 사건이 뒤늦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변호를 맡은 케이프타운의 법무법인 하네콤은 ‘거래소의 자작극’으로 의심하고 있다. 외부 해킹이 아닌 내부자 소행이란 의미다. “케이지 형제 등 경영진이 거래소와 고객들이 보유한 비트코인을 다수의 다크웹(특정 프로그램으로 접속 가능한 비밀 웹사이트) 텀블러 등으로 분산시켜 자금 추적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현재 거래소 온라인 사이트는 문을 닫은 상태다. 케이지 형제는 영국으로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자들은 이들에 대한 추적과 수사를 남아공 경찰 특별수사대인 ‘호크스’에 요청하는 한편, 거래소를 상대로 청산 절차도 밟고 있다.
다만 금융 당국의 정식 조사 개시까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브랜든 토팜 남아공 금융행위감독기구(FSCA) 집행책임자는 “암호화 자산은 법적으로 금융 상품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당국이 공식 조사에 착수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암호화폐가) 규제 당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남아공에선 지난 1월 하루 거래액이 1억4,100만 달러(약 1,600억 원)를 넘어섰다”며 “6만9,000개의 비트코인이 사라진 이번 사건은 암호화폐 역사상 최대 손실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