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통 소재인 색동옷과 호미, 갓이 뜻밖의 한류를 이끌고 있다. 국내에서 홀대 받는 전통 복식과 농기구가 오히려 '밖'에서 새롭게 주목 받고 있는 것이다. 주 방식은 한류를 이끄는 대중문화를 통해서다.
방탄소년단 멤버 RM이 랩으로 언급한 호미는 세계 최대 온라인 상점인 아마존에서 원예용품 '톱10'에 올랐고, 내달 속편 공개를 앞둔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은 조선 시대 '갓' 열풍에 불을 붙였다.
한국 전통 의상에 대한 해외 주류시장의 관심도 부쩍 높아졌다. 명품 브랜드 구찌는 국내 현대무용단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를 앞세워 홍보 영상을 찍은 뒤, 이 무용단의 의상 트레이드마크이자 한국 전통 문양인 색동에서 영감을 받아 색색의 줄무늬 디자인을 최근 선보였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국악 그룹 이날치의 노래 '범 내려온다'에 맞춰 색동옷을 입고 엇박자의 춤을 추는 모습이 담긴 영상('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으로 23일 기준 조회수 6억 건을 돌파, 세계 온라인을 후끈 달군 이들이다. 올해 창사 100년을 맞은 구찌가 특정 국가의 전통 디자인을 활용해 스페셜 제품을 내놓기는 이례적이다. 농사를 주업으로 삼던 조선 시대도 아니고 21세기에 그것도 해외에서 색동옷과 호미, 갓에 눈독을 들이다니. 세계에서 한국 전통문화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빨강, 초록, 노랑, 파랑, 주황색 등의 색동 디자인을 변형한 옷으로 멋을 낸 무용수들이 깡충깡충 뛰며 신나게 발을 구른다. 그들의 춤 뒤로 청계천을 비롯해 공구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선 을지로 골목 등 서울의 명소들이 지나간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몸값' 높은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신곡 '하이어 파워' 뮤직비디오와 안무 영상에 등장하는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모습이다. 댓글 창엔 '우주를 떠올리게 하는 춤 동작과 독특한 의상이 정말 좋았다' 등의 호평이 이어졌다. 한국의 도깨비 같은 무용수들이 콜드플레이와의 협업으로 또 세계를 홀린 것이다.
합작은 콜드플레이의 러브콜로 이뤄졌다. 콜드플레이 측이 지난해 12월 이 무용단으로 먼저 연락을 했고, 1월에 밴드의 간판인 크리스 마틴과 화상 만남이 이뤄졌다. "우리가 너희 영상에 출연하는 것처럼 구성을 짜 줄 수 있어?" 마틴의 요구였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3월,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와 콜드플레이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모처에서 만나 뮤직비디오를 함께 찍었다. 22일 서울 서초구 소재 지하 연습실에서 만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김보람 단장은 "마틴이 '범 내려온다' 공연 영상을 매력적으로 봤고, 전통에서 따온 의상과 춤 동작이 독특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구찌, 콜드플레이와 이 무용단의 협업은 세계 패션계의 변두리였던 한국의 전통 복식의 독창적 매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로 꼽힌다. 김 단장은 "색동옷이 예스럽게 보인다고 다들 꺼리지만, 그 화려한 색감과 옷감의 매끄러운 재질을 두고 '왜 활용을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며 "구찌가 색동옷 관련 프로젝트를 하고 이곳저곳에서 다시 색동옷을 활용한 의상들이 나오는데 더 다양한 방식으로 색동옷 디자인이 퍼졌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웃었다.
국내에선 외면 받는 호미가 해외에선 '농기구계의 방탄소년단' 취급을 받는다. 김정숙 여사는 지난주 오스트리아 빈대학 식물원을 방문해 "아마존 최고의 히트 상품"이라며 호미를 선물했다. '호미 외교'를 한 셈이다. 김 여사가 선물한 호미는 석노기 장인이 만든 것이고, 아마존에서도 석씨의 호미가 팔린다. 석씨는 본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달까지 올 상반기에만 아마존에 호미 3,000개를 납품했다"며 "코로나19와 상관없이 해외에서 꾸준히 주문이 들어와 올해 만 개 정도 나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호미는 방탄소년단 멤버인 RM이 2019년 낸 노래 '서울 타운 로드'에서 "내겐 호미가 있어. 들어는 봤니? 한국에서 온 철로 만든 건데, 최고야"라고 랩을 한 뒤 판매량이 수직 상승했다.
덕분에 온라인엔 외국인들의 호미 사용 인증 영상이 쏟아졌고, 화제가 되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RM이 쓴 가사에 등장하는 '호미'는 한국식 손쟁기'라고 설명하는 기사까지 내보냈다. 아마존 구입 후기엔 '호미를 사기 전까진 구멍을 파는 흉내를 냈을 뿐' '땅을 파거나 측면에 있는 잡초를 파는 게 얼마나 쉬운지 알았다' 등이 영어로 굴비 엮이듯 올라왔다. 꽃삽이나 쇠스랑 정도만 쓰던 외국인들에겐 'ㄱ'자로 꺾어져 땅을 파기 쉬운 호미가 혁신적인 원예 용품으로 여겨진 것이다.
외국인들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 소재 드라마 '킹덤'에서 좀비보다 갓에 더 눈길을 두고 있다. 신분에 따로 다양하고 화려한 전통 모자를 쓴 모습에 푹 빠져들어서다.
영화 '19곰 테드'를 제작한 존 제이컵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킹덤'을 즐겁게 보고 있는데, 극에 나오는 수많은 모자에 대해 설명해줄 학자는 없을까'라고 관심을 보였다. 좀비 드라마를 통해 뜻밖에 한국의 전통 복식이 해외에서 관심 대상이 된 것이다. 갓의 발음이 '신'을 뜻하는 영어 'God'과 같아 외국인들은 갓에 대한 관심을 '오 마이 갓'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아마존에선 '킹덤 햇(모자)'이란 이름으로 갓이 팔리고, 고궁과 인사동엔 갓을 쓰고 서울의 명소를 도는 외국인들도 늘어나는 분위기다. 경복궁 인근 한복대여점에서 만난 직원 김모씨는 "외국 남성 두 명 중 한 명은 갓을 먼저 찾는다"며 "갓을 쓰고 싶어 한복을 빌리는 외국인 손님도 많고, '왕 모자 있나요?'라며 찾는데 갓이 품위 있어 보인다고 하더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