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둘레길? 산사태 등 위험 도사리는 고난길

입력
2021.06.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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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열풍' 편승해 지자체 둘레길 조성 경쟁 
트럭 다니고 낙석 위험에 흙먼지 풀풀 날려
안전 문제로 개장 전 폐지도… 혈세 낭비 논란

18일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말티고개(해발 430m). ‘말티재 꼬부랑길’이란 둘레길 이정표를 따라 계속 걸었지만, 꼬부랑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말티재와 인접한 산 허리를 깎아 연결한 길은 폭 4~6m의 번듯한 대로였다. 중장비로 깎고 닦아 만든 마사토 길에선 흙먼지만 풀풀 날렸다. 그늘도 거의 없어 8㎞ 가까이를 뙤약볕 아래 걸어야 했다.

도중에 만난 정모(58·충북 청주시 상당구)씨는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호젓한 꼬부랑길이라고 홍보하는 게 어디 있느냐”고 화를 냈다. 조용한 산길을 즐기는 그는 인터넷에서 숲길 명소를 찾다가 꼬부랑길 홍보 글이 한눈에 들어와 이날 말티재를 일부러 찾았다고 했다.

전국 곳곳에 엉터리 둘레길이 넘쳐나고 있다. 걷기 좋아야 할 길이 실제론 걷기 힘들고 불편한 길인 경우가 허다하고, 산사태 등 안전 사고 위험이 도사리는 곳도 적지 않다. 주범은 걷기 열풍에 편승해 주변 환경과 사업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경쟁적으로 둘레길 사업에 뛰어든 지방자치단체들이다. ‘졸속 행정의 표본’이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말티재 꼬부랑길은 보은군이 속리산 말티재 권역 관광휴양지 개발 사업의 하나로 추진해 2017년 개장했다. 당시 보은군은 “자연 속에서 명상을 즐기는 체험형 숲길을 조성하겠다”고 알리면서, ‘말티재 꼬부랑길’을 상표 등록까지 했다.

하지만 실상은 딴판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이 둘레길은 상당 부분의 구간을 산허리를 깎아 만든 임도를 활용하는 바람에 호젓한 숲길 조성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늘을 만들겠다고 길가에 심은 단풍나무는 관리 부실로 상당수가 말라 죽은 상태다. 무분별한 공사 탓에 일부 구간에선 비만 오면 산사태가 발생, 등산객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최근엔 공사 차량용 트럭까지 드나들면서 안전사고 위험은 더 커진 상황이다.

보은군 관계자는 “구불구불한 산길 경관이 일품인 말티재를 홍보하는 차원에서 ‘꼬부랑길’이란 명칭을 붙였다”며 “공사 차량은 모노레일 설치 공사 등이 마무리되는 이달 말쯤 운행을 중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충북 옥천군이 67억 원을 들여 대청호변에 조성한 ‘향수호숫길’은 개장한 지 1년 반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일부 구간은 출입이 불가능하다. 전체 5.6㎞ 중 현재 3.3㎞ 지점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 이는 준공(2019년 11월) 두 달 만에 안전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구간은 안전도 평가에서 D등급을 받았다. 집중호우로 낙석이 발생해 데크길 일부를 덮치기도 했다. 옥천군은 할 수 없이 문제의 구간을 폐쇄한 채 내년 말까지 안전시설물 등을 설치하기로 했다. 보수 공사에 드는 비용은 50억 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청주에선 안전 문제 때문에 완공한 둘레길을 개장도 하기 전에 폐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문제의 둘레길은 청주시가 15억 원을 들여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변에 설치한 ‘문산길’. 지난해 말 완공된 이 길(3㎞)은 조성 전부터 호수 위 부교(300m)의 안전성 문제로 논란이 됐다. 설계 당시 “수위 변동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청주시는 그대로 사업을 강행했다. 결국 시는 둘레길 완공 이후인 지난 5월 “집중 호우로 대청호 수위가 높아지거나 기상이 악화하면 부교를 이용할 수 없다”며 부교 철거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문산길은 개장도 하지 못한 채 폐지됐고, 부교 철거비 8,000만 원을 합쳐 총 15억8,000만 원의 혈세만 낭비하는 꼴이 돼버렸다. 이 사업을 졸속 추진한 관련 공무원 3명은 감봉 등 징계 처분을 받았다.

박연수 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처장은 “둘레길은 임의적인 가공품이 아닌,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진 길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때 의미가 있다”며 “관광객 유치에 눈이 멀어 무분별하게 추진되는 둘레길 조성 사업을 다시 돌아봐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보은=글·사진 한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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