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잡을 수 없이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오늘의 세계이다. 통신 매체의 발달로 세상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가속화되어 보도되는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출판된 책에 사학자 조지 R. 테일러 교수의 '교통혁명'이라는 책이 있다. 미국의 19세기 중반까지 교통수단의 혁명적 발달, 기차나 기선(汽船)과 같은 운송수단의 발달, 또 그에 따른 도로, 운하, 철도 등의 개발로 인하여 일어난 사회, 도시, 경제 그리고 생활의 변화를 다룬 것이다. 교통수단의 발달이 일으킨 삶의 혁명적 변화는 근대 사회의 성격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 주제의 하나이다. 교통수단의 발달은 미국을 넘어 지구상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요인이다.
통신수단의 발달은 교통수단에 못지않게, 또는 그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인간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할 것이다. 통신수단 혁명은 참으로 오늘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빠질 수 없는 연구 과제이다. 삶의 변화의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이러한 연결 수단의 발달 이전 산업화의 진행에 들어 있었다. 산업화는 삶의 수단의 기계화, 인구의 도시집중, 인간 관계의 새로운 뒤얽힘, 착종(錯綜) 등을 가져왔다. 산업혁명, 교통 혁명, 통신 혁명 등이 오늘의 세계를 섬세하게 가려 보기 어려운 복잡한 통일공간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통일 공간이라기보다는 카오스(혼돈·混沌)의 덩어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을 하나의 원리로 파악하여 조직화할 수 있는 질서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삶의 혼돈을 하나의 질서로 장악해 보려는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정치는, 또는 정치권력은 사회 구조를 그에 맞추어 새로 조직하고자 시도한다. 이것은 우선적으로 진보주의 경향을 말하는 것이 되지만, 한국과 같은 거대한 역사적 변화 속에 있는 사회의 정치는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현실 변화에 방향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행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계획하는 변화의 규모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념적 지향을 통하든, 조직의 강화를 통하든 현실 구조를 명료화하려는 노력은 또 그 나름의 장애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사회 조직은 그 규모가 커질수록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지게 된다. 큰 규모의 현실에는 여러 가지 불투명한 요소들이 개입되기 쉽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요소로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조직의 부분 부분에 끼어드는 부패이다. 부패는 정치의 목표를 불투명하게 한다. 이 불투명은 이념과 조직의 시발자(始發者) 그리고 그것을 표방하는 측에 숨어 있을 수 있다. 사회 개조의 목표를 표방하면서, 스스로에 대하여 비판적 검토를 허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 된다. 거기에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보다 큰 목표를 위한 전략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사사로운 이익은 흔히 목표에 의하여 정당화되고 집단적 단합 속에 감추어진다. 붕괴 이후 소련 연구에서 자주 지적되는 것은 정권 내부 사람들의 사익 추구이다. 한국의 경우를 여기에 비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지만, 적어도 소련의 내부 부패는 우리에게도 반면교사의 역할은 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더불어민주당에서 부동산 투기의 의혹이 있는 국회의원들을 출당하게 한 것, 또는 군대 내부에서 일어난 성 폭력의 문제를 철저하게 조사하겠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것이다. 사회 조직이 복잡해지면서도 그 투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정치와 삶의 현실의 필수적 조건이다. 사회가 근대적 복잡성을 더해 갈수록 절실한 것은 공공 질서의 투명성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공적 허위를 가려낼 수 있는 부단한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사회는 삶의 기획들이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는 투명한 공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