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준다는 백신은 절대 ‘얀센’일 리 없다.”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주한미군과 접촉하는 한국군 55만 명에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제공하겠다”고 깜짝 발표하자 국방부 출입기자들은 그 백신이 화이자 혹은 모더나라고 장담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얀센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얀센이 들어오더라도 맞을 수 있는 장병이 우리 군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사용 승인된 코로나19 백신은 화이자, 모더나, 얀센 3종입니다. 그런데 얀센의 경우 아스트라제네카(AZ)와 마찬가지로 희귀 혈전증(혈관 속에서 피가 굳어지는 현상) 우려로 30세 미만에게 접종 중단을 권고했습니다. 이에 군 당국은 이미 4월 말부터 30세 이상인 11만여 명에 대해서만 AZ 1차 접종을 개시했습니다. 접종을 시작 못한 40여만 명에 달하는 30세 미만 장병들에겐 AZ나 얀센이 아닌 화이자, 모더나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앞서 지난달 17일 주한미군이 우리 군에 무상 제공한 얀센 백신 여유분(1만3,000여 명분)을 민간 접종용으로 넘긴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얀센은 우리 군에 ‘필요 없는 백신’인 거지요. 바이든 대통령은 기자회견 당시 백신 종류를 언급하진 않았습니다.
1주일 뒤 국방부 출입기자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미 행정부가 한국에 제공할 백신을 얀센이라고 발표한 겁니다. 물량도 애초 언급보다 두 배 많은 101만 명분이었습니다. 미국이 제공한 백신으로 조기 접종이 가능해져 오는 8월 한미연합군사연습(한미연합훈련)의 정상 실시 가능성을 거론했던 언론은 머쓱해졌습니다. “이번에도 북한 눈치를 보며 연합훈련을 축소하면 백신을 제공한 미국에 대한 배신”이라며 우리 정부를 다그쳤던 거지요.
군 당국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접종 대상을 정하는 것부터가 문제였습니다. 미국이 “한국군에 제공하라”고 준 백신을 아무나 맞힐 수는 없으니까요. 이에 군인과 자주 접촉하는 군인 가족, 군무원을 비롯한 국방 관련 종사자(13만7,000명), 예비군(53만8,000명), 민방위 대원(304만 명)을 접종 대상으로 추렸습니다. 국방부를 출입하는 저도 국방 종사자로 묶여 백신 접종 신청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부승찬 국방부 대변인은 1일 브리핑에서 ‘애초 미국 정부가 언급한 현역 군인 대신 예비군, 국방 관련 종사자를 접종 대상으로 누가 정했느냐’는 질문에 “한미 합의하에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역시 우리 장병이 못 맞는 얀센을 줘놓고 ‘현역 군인만 접종하라’고 강요하진 못했던 겁니다.
이쯤에서 미국이 얀센을 100만 명분씩이나 우리나라에 준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한 달 전만 해도 “미국이 외국군 전체를 대상으로 백신을 제공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정부가 자화자찬한 ‘한미동맹의 공고함’이 통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당시 페이스북에 “바이든 대통령의 백신 지원은 그야말로 깜짝선물이었다”며 “선진국인 한국에 왜 우선 지원하느냐는 내부 반대에도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특별히 중시한 결과”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 군이 맞지 못하는 얀센이 들어오면서 그 명분은 흐려졌습니다.
일각에선 미국이 보유한 얀센 백신의 유통기한이 임박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공교롭게도 지난 5일 국내에 들어온 얀센의 절반은 23일, 나머지는 다음달 2일에 유통기한이 끝납니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 역시 8일(현지시간) ‘미국 정부가 유통기한이 임박한 얀센 재고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이 확보한 약센 백신 2,140만 회 중 절반이 사용되지 않은 채 보관 중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올 4월 미 보건당국이 혈전증 우려로 얀센 접종을 한동안 중단하면서 미국인들이 얀센을 기피한 탓입니다. 반면 화이자와 모더나는 이미 80% 이상 재고를 소진했습니다. 백신 무상 제공의 이유가 ‘한미동맹’보다는 백신 ‘재고 처리’에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 이유입니다.
물론 미국의 백신 원조는 고마운 일입니다. 백신난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으니까요. 지난 1일 얀센 접종 사전 예약이 시작된 지 18시간 만에 마감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애초 20일까지 예정됐던 접종도 나흘 앞당긴 지난 16일에 끝났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백신을 무상으로 받고 제공한 반대급부가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 LG 등 우리 4대 기업은 백신을 내어준 미국에 총 44조 원(394억 달러) 규모의 공장을 짓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 기업의 대미투자액 44조 원를 얀센 백신 제공분인 100만으로 나누면 4,400만 원입니다. “1회분당 10달러 남짓한 얀센 백신을 4,400만 원을 주고 사온 격”이라는 누리꾼의 우스갯소리가 가볍게만 들리진 않습니다.
문 대통령은 중국과의 관계를 의식해 그간 금기시했던 ‘대만 해협’ 문제를 한미 공동성명에 담았습니다. 이어 회견장에선 “대만 해협의 평화 유지는 중요하다는 견해를 (미국과) 함께했다”고 직접 육성으로 밝히기까지 했습니다. 중국은 당장 반발했습니다.
일각에선 ‘한미 미사일 지침’의 해제를 이번 정상회담의 큰 성과로 꼽습니다. 42년간 미사일 개발 과정에서 우리 발목을 잡았던 족쇄가 완전히 풀렸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미사일 주권’ 회복보다는 중국의 군사적 팽창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더 크게 반영됐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립니다. 미국이 ‘아무 이유’ 없이 제한을 풀어줄 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지침 해제로 탄두 중량에 이어 800㎞에 묶였던 사거리 제한이 완전히 풀리면서 우리는 중국을 겨냥한 미사일 개발이 가능해졌습니다. 미국 입장에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으로 대중국 견제 효과를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38년간 미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주로 외교위원회에 몸담았던 ‘외교 베테랑’답게 바이든 대통령은 백신 공여만으로 경제·군사·외교적 실리는 물론 ‘미국은 동맹을 중시한다’는 명분을 내걸며 체면까지 챙겼습니다.
한미동맹의 역사는 짧게는 한미가 혈맹으로 싸웠던 1950년 6ㆍ25전쟁, 길게는 고종 시절인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당시 조선 시장에 진출하는 조건으로 안보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통상조약 1조에 ‘한 나라가 제3국으로부터 위협을 당하면 다른 일방이 중재에 나선다’는 내용을 못 박으면서 우리는 미국을 든든한 파트너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순진한 착각이었습니다. 미국 눈에 한국은 자신들의 유불리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약소국에 불과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힘없던 시절에 맺은 관계이기에 동등할 리 없습니다. 미국이 우리의 방패막이가 돼주는 대신 우리는 미국 앞에서 '불완전한 주권'을 행사했습니다. 더구나 미국은 결정적 순간마다 뒤통수를 쳤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을 끝내기 위해 양국이 맺은 포츠머스 조약에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에서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기자 다급해진 고종은 이승만을 미국에 특사로 파견합니다. 이승만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막아달라”는 밀서를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에게 전달하며 SOS를 친 겁니다. 그러나 미국은 외면했습니다. 당시 미일 사이에는 ‘조선(일본)과 필리핀(미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묵인하는’ 내용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지요. 러시아와 일본에 포츠머스 조약을 성사시킨 회담의 판을 깔아준 것도 루스벨트 대통령이었습니다. 포츠머스는 미국에 위치한 군항도시입니다.
돌이켜보면 6ㆍ25전쟁의 비극을 낳게 한 남북 분단도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러시아)의 세력 다툼에서 비롯됐습니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성으로 강대국들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경험을 수차례 반복하며 우리가 얻은 교훈은 “미국도 방식만 세련됐을 뿐, 결국 자국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비밀리에 핵 개발을 시도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가 베트남전 파병으로 미국을 도왔음에도 1970년대 초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운운하며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고 하자 그는 ‘미국이 결정적 순간에 한국을 외면할 것’이란 의심을 품습니다. 프랑스와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 획득을 위한 협상에 나서며 핵 개발에 착수한 배경입니다. 그러나 1974년 미국은 우리의 핵개발 사실을 알게 됐고, 군사동맹은 물론 모든 경제적 지원을 끊겠다는 압박에 프랑스와의 계약을 전면 취소했습니다.
그러나 1977년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건 지미 카터가 미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한반도 내 전술핵 일부 철수를 언급하자 박 전 대통령은 ‘미국 핵우산으로 한국을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됩니다. 2011년 기밀해제된 미 중앙정보국(CIA) 보고서에는 “1976년 중단한 것으로 알려진 박정희 정부의 핵 개발이 최소 1978년까지 추진됐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1977년 한국이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중심으로 미사일 사거리를 늘려왔다는 사실과 함께 이것이 핵무기 개발과 연관됐을 것이라는 미국의 의구심도 언급돼 있습니다.
실제 박정희 정부는 1978년 9월 ADD 안흥시험장에서 미국의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개조한 첫 국산 미사일 ‘백곰’ 시험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세계에서 7번째 미사일 개발국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당시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에 이어 지미 카터 행정부가 파견한 사찰단까지 ADD를 찾아와 미사일 개발 중단을 압박했습니다. 백곰 미사일을 ‘핵무기 운반체’라 여긴 겁니다. 박정희 정부가 핵개발을 지속하고 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던 거지요.
1979년 7월 위컴 사령관이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에게 “미사일 개발을 중단하라”는 공식 서한을 발송하고 이에 두 달 뒤 노 장관이 “미국이 용인하는 범위인 사거리 180㎞ㆍ탄두 중량 500㎏ 이내에서만 개발하겠다”고 답신을 보낸 것이 최근 해제된 미사일 지침의 시작이었습니다.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 우리 스스로 “주권을 제한적으로 행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그리고 그 무렵 박 전 대통령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암살로 인한 사망이었음에도 ‘미국 배후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세계평화를 위해 군비 경쟁을 막는다”는 그럴듯한 논리로 우리의 미사일 주권을 제한했지만 정작 그들은 사거리 수천㎞가 넘는 미사일을 대량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핵 개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은 1969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채택하며 1967년 1월 이전에 핵을 보유한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만 합법적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고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강대국의 전형적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사례입니다. 미국이 동맹인 한국의 군사력 증강을 바라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확인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한미동맹이 ‘비대칭적 군사동맹’일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지요.
한국일보와 한국리서치가 지난달 25~27일(전국 성인 남녀 3,000명 대상)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이 우리 국익에 미치는 영향’을 묻는 질문에 54.8%가 “우호적”이라고 답했습니다. 중국(7.1%), 일본(7.0%), 북한(4.9%) 등 주변국에 비해 미국에 대한 호감도가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견제’ 연합체 쿼드(Quad)에 대해서도 61.6%가 “동참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국민 대다수의 생각처럼 미국은 우리의 핵심 동맹이자 우방입니다. 실제 위기의 순간마다 미국의 도움을 받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맹신이 돼선 곤란합니다. 미국을 움직이는 건 동맹의 안위가 아닌 자국이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쿼드 가입을 요구해도 세계 정세가 급변하면 미국 역시 돌변해 중국과 손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간 미국의 변심은 우리를 적잖이 당황시켰습니다. 이라크전에 집중했던 노무현 정부 시기 “전시작전통제권을 얼른 가져가라”고 했던 미국이 중국의 급부상에 갑자기 전작권 전환에 인색한 태도를 보인 것이 대표적입니다. 결국 우리가 믿을 건 동맹이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실현시켜주는 길은 '자강(自強)'에 있단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