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런 재벌 드라마는 없었습니다. 그 어떤 세계보다 철저히 가부장적인 재벌가에서 며느리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라니, 시작부터 흥미진진합니다. 물론 여성들이 주인공인 재벌 드라마가 처음은 아닙니다. 백미경 작가의 전작인 '품위 있는 그녀'만 해도 여성들을 중심으로 재벌가 이야기를 다뤘죠. 하지만 재벌가에서 주변인 역할을 하던 며느리들이 권력을 뒤흔드는 드라마는 흔치 않습니다.
재벌이라는 화려한 세계를 다루지만 정작 이 드라마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나의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일 겁니다. 부모가 갖고 있는 권력과 돈은 모두 자식의 것인가. 그렇다면 친자와 혼외자가 주장할 수 있는 '나의 것'은 어디까지인가. 자식을 낳은 친어머니와 아이를 정성으로 키운 새어머니 중 아이를 나의 것이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자극적인 소재와 전개를 끌어와 막장으로 치닫는 드라마가 아닌, 꽤나 진지한 질문을 하는 드라마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시청률도 나쁘지 않습니다. 19일 방송된 13회는 수도권 가구 기준 평균 9.8%(닐슨코리아 집계 기준), 전국 가구 기준은 평균 8.8%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드라마 '마인'의 매력을 문화부 기자 4인이 뭉쳐서 털어봤습니다. 참고로 이 대화는 12회까지 방송분을 토대로 했습니다.
[라제기] ‘럭셔리 웰메이드 막장 드라마’. 재벌을 비판하는 듯하면서 재벌의 삶을 훔쳐보는 재미를 주는, 형용모순의 드라마.
[고경석] SBS '펜트하우스' 때문인가. 막장이라기엔 뜻밖에도 점잖은 드라마였어요. 재벌가의 며느리들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펼친다는 점도 새로웠죠. 하지만 초반엔 굉장히 몰입하면서 봤는데 '친모 이슈'가 정리된 뒤엔 긴장감과 흥미가 조금 떨어지더군요.
[권영은] 재벌가 상속이라는, 어쩌면 드라마에서 너무 익숙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걸 비트는 설정들이 재미있어요. 저도 지금은 조금 흥미가 줄어든 상황입니다.
[라] 화려하고도 기이할 재벌가의 일상을 훔쳐보는 재미가 뒤로 갈수록 떨어지는 것 아닐까요. 볼수록 무뎌진다고 해야 할까요.
[권] 네. 보는 즐거움이 있는 것 같아요 그들의 화려한 일상이 지금까지 드라마에서의 재벌 묘사와는 다른, ‘어나더 클래스’인 것 같고요 특히 공간이 압도적이죠.
[라] 맞아요. 산 속 미술관 같은 공간이 처음부터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창고형 냉장고 등 특이한 아이템 역시 눈길을 잡고요. 저희 집에서 쓰는 물건은 하나도 없더라고요(웃음).
[양승준] 백미경 작가의 미스터리 막장극에 물이 오른 것 같아요. 전 되레 뒤로 갈수록 흥미로워요. 인물들의 가진 전사와 이중성 등이 드러나면서 미스터리적 요소도 강화됐고요. 12회 전편이 좀 느슨하긴 했지만, 엠마 수녀(예수정)부터 한 회장(정동환) 등 인물들의 반전이 점점 드러날 거 같아 궁금해지더라고요. 한 회장의 경우,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라고 해도 다른 남자에게서 낳은 아들에게 그룹을 물려줄 수 있을까요. 독한 전사가 펼쳐질 거 같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 모녀 욕설 사건으로 그룹 이미지가 땅에 떨어진 기업 이야기에다, 도시전설처럼 떠도는 모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연예인이 재벌가에 결혼해서 들어갔더니 다른 며느리들이 영어로 대화하더라, 그래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 익혔더니 이젠 그들이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더라는, 그런 믿거나 말거나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누구나 한번쯤 엇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봤을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듯한 재벌 이야기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생활을 그리며 낯설게 펼쳐지는데, 이 점이 시청자들 눈길을 잡는 포인트인 듯해요.
[고] 어디선가 많이 들어온 재벌 이야기를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점이 대중적으로 잘 먹힌 것 같아요. 극중 재벌가 막내인 딸 한진희(김혜화)의 '크림빵 사건'도 모 재벌가의 갑질을 연상시키죠. 드라마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재벌가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도 암투가 아닌 연대라는 점이 독특해요. 이런 재벌 드라마는 전 처음 봤어요.
[권] 재벌 드라마에선 흔히 며느리들이 자기 남편을 후계자로 세우기 위한 대리전을 펼치고 경쟁하고 반목하는데 ‘마인’에선 첫째 며느리 정서현(김서형)과 둘째 며느리 서희수(이보영)가 협력하고 의지하는 관계라는 점이 신선했어요
[양] 워맨스가 과연 끝까지 갈지.. 전 처음에 엠마 수녀가 이 두 며느리와 연대한 워맨스라고 생각했는데 중반 들어서니 아닌 거 같고...
[라] 일종의 오월동주, 전략적 제휴라고 봅니다. ‘돈지옥’에서 영원한 연대나 워맨스는 없으니까요.
[고] 두 여성 주인공은 굉장히 똑똑하고 별 흠이 없는 인물들인데 비해 그 남편들은 못났거나 ‘구린’ 구석이 있는 인물로 나와요. 기존의 재벌 드라마를 뒤집어놓았어요. 작정하고 재벌 드라마의 가부장적 구도를 깨부수겠다는 느낌이랄까.
[양] 전 '품위 있는 그녀'와 비교하면 미장센이 눈에 들어왔어요. 공간, 구도, 소품, 영상의 톤 등. 그래서 재벌가 막장이 세련되게 느껴져요. 이나정 PD의 연출이 보탬이 된 것 같아요. KBS '눈길'과 '쌈마이웨이' 때 인상 깊었는데 tvN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했던 미술감독을 만나서인지 때깔이 확실히 나아진 거 같아요..
[라] 저는 약간 장르적 측면에서 보게 되더라고요. 하준이의 친모 이혜진(옥자연)은 마치 홍콩 영화 ‘무간도’에 등장하는 언더커버 같아요. 재벌가 사람들이 메이드에게 돈을 줘서 각자 정보원으로 심는 장면도 경찰과 범죄조직의 암투처럼 보이잖아요. 단순한 재산, 상속 싸움이 아니라, 갱스터물, 형사물 요소를 집어넣었다고 할까요. 막장은 막장인데 훔쳐보는 재미를 강화한 것이 가장 큰 성공 요인이라고 봅니다.
[권] 여성 두 명이 각자의 ‘마인’을 지키기 위해 부계 혈통으로 계승되는 가부장제에 맞선다는 면에서도 결코 가볍지는 않은 작품 같아요.
[고] 사실 이 드라마의 구도는 왕권을 다룬 사극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요. 뭔가 부족한 남성들이 대를 이어 권력을 승계하는 구도를 똑똑한 여성들이 연대해서 깨부수고 자신들만의 '마인'을 지킨다는 점에서 기존 드라마와는 확실히 차별점이 있어요. 끝까지 봐야 알겠지만, '품위있는 그녀'보다 여러모로 진일보한 느낌입니다.
[권] 이 드라마에서도 여성을 '아이 캐리어'로 인식하고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한지용이 강자경을 집에 들인 것도 서희수와 함께 낳은 엄마가 함께 보살피면 자신의 아들이 완전해질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서였고요. 임신한 서희수보다 태중 아이의 안부를 먼저 묻죠. 무엇보다 10개월을 뱃속에서 키우고 낳아도, 몇 년을 정성과 사랑으로 키워도 여성은 아빠를 제끼고 아이를 데리고 나올 수 없다는 게 결정적이고요.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두 엄마가 함께 맞선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라] 저는 제목을 골똘히 생각해 봤어요. '마인(Mine)'은 ‘내 것’ ‘내 가족’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광산'이라는 뜻도 있고 '지뢰'라는 의미도 있잖아요. 재벌가는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묻힌 광산 같은 곳이지만, 언제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곳이죠.
[양] 전 서현 역에 김서형 말고 다른 배우가 떠오르지 않아요. 그 차분함과 냉정함. 김서형은 꼭 영화 '캐롤'의 케이트 블란쳇을 보는 것 같았어요. OCN '경이로운 소문'에서 눈 여겨 봤던 옥자연도 묵직했고요. 이름값에 비해 중책이라 잘 할까 싶었는데 해내더라고요.
[라] 배우들 연기가 다들 좋아요. 특히 정이서(메이드 유연 역)와 김혜화를 발견했습니다. 김혜화는 조연만 한 10년 넘게 꾸준히 해야 나올 명연기를 보여주는데 뜻밖에 출연 경력이 많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많이 놀랐어요.
[권] 배우들 연기가 다 좋은데 정이서와 차학연(효원그룹 장손 수혁 역) 커플이 등장할 때는 조금 루즈해지더라고요. 아무래도 연기력면에선 내로라하는 선배들 때문이겠죠.
[고] 둘이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 줄 알았는데 짝이 되는 순간부터 흥미가 급감했어요. 배우들도 연기가 좀 심심하고.
[권] 둘을 엮는 것부터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요. 방을 바꿔야 잠이 잘 온다니. 설정 자체가 좀 억지스러웠어요.
[라] 저도 그건 너무 이상했어요.
[양] 너무 끈적이더라고요 ㅎㅎㅎ 이상하게
[권] 재벌 3세라고 다 매력적인 건 아니지만 남자 캐릭터 중에서 유일하게 여심을 잡을 인물인데 매력 어필이 전혀 안 되는 것 같아요. 가진 것 다 포기하고 자기 삶을 살겠다는 사람이 그런 기세도 전혀 없어 보이고요. 캐릭터를 잘못 잡은 것은 아닌지, 연기와 움직임 자체도 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입니다.
[고] 박원숙은 자주 언급되는 비슷한 연배의 여배우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열연이어서 흥미로워요.
[라] 호탕하게 웃으면서 대범한 듯한데 우울증이 있는 재벌가 사모님 묘사가 눈길을 확 잡더라고요. 이전 재벌가 사모님 묘사는, 앞에선 점잖고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식의 전형성이 있었는데, 양순혜는 많이 달라요. 약간 사이코패스형이라 웃음을 주는 듯해요..
[양]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져요. 우리가 본 그들이 다 사패(사이코패스) 같았잖아요 ㅎㅎ
[권] 엄마를 똑 닮은 딸과의 케미도 좋아요. 둘이 붙으면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나요.
[고] 초반엔 옥자현이 연기한 강자경-이혜진 캐릭터가 아주 흥미로웠는데 희수가 유산하고 난 뒤엔 혜진 캐릭터가 갑자기 순하게 바뀌어서 맥락이 끊기더라고요. 서현 희수 혜진 3인의 연합을 위한 설정이었겠지만 좀더 자연스럽게 이어졌으면 했어요
[양] 너무 확 변했어요. 저도 그 점이 아쉬워요.
[권] 독한 마음 먹고 재벌가에 들어온 사람이 갑자기 라이벌인 희수가 유산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돌아섰다는 게 쉽게 수긍이 가진 않더라고요
[고] 이혜진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엠마 수녀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죠.
[권] 심지어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다녀서도 화제가 됐죠. 효원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게 최순실 같은 느낌이에요. 한지용의 뒤를 봐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엠마 수녀에 대한 인물 소개에서 '그녀의 비밀은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는 걸 보면 드라마 후반부를 좌우할 중요한 열쇠를 가진 인물이지 않을까요.
[양] 전 엠마 수녀가 한지용(이현욱)의 엄마 같아요. 죽었다고 했지만 죽지 않은 한지용 아들 친모 강자경처럼.
[라] 이 드라마의 촘촘함은 홍송원 갤러리서미 대표의 조언 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재벌가와 가깝게 지냈던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미술품 관련 스캔들로 징역형을 받았던 문제적 인물을 자막에 꼭 넣어야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1, 2회 끝부분에 ‘도움 주신 홍송원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자막이 있었죠.
[권] 배경에 걸린 그림 보는 재미가 컸습니다.
[라] 그것도 홍 대표 자문 덕 아닐까요.
[고] 누군가 해서 찾아보니 대기업과 미술품 거래 관련해서 스캔들을 일으켰고 징역형까지 받았던 분이네요.
[권] 제작진이 실제로 재벌들 만났다고 하던데 누구와 만났을까요? 괜히 궁금해지네요.
[고] 백미경 작가가 '품위있는 그녀'를 쓸 때도 재벌들 취재를 많이 했대요. 그때 취재한 것에 더해 추가 취재를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품위있는 그녀' 때도 실제 취재한 내용이 드라마에 표현된 것보다 수위가 훨씬 높았다고 말했어요.
[양] 그 취재를 통해 나온 게 산소 서사. 효원가 저택의 산소 포화도는 일반 공기 대비 15배 높다는 설정이죠.
[고] JTBC ‘스카이캐슬’이나 SBS ‘펜트하우스’처럼 최근 히트작들을 보면 재벌이나 최상류층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요. 예전에 비해 막장 요소는 좀 줄고 웰메이드가 늘어난 점도 특징인 것 같아요. 재벌을 꼬집는 드라마도 실제론 재벌에 대한 판타지와 동경을 심화시키기도 하죠. 재벌 드라마는 왜 이렇게 잘 팔리는 걸까요.
[양] 우리나라에 유독 이런 재벌가들의 이야기가 많지 않나요? 미드나 일드에서 이렇게 주류인 거 같진 않은데...
[라] 동경과 훔쳐보기, 입방아가 이유라고도 생각합니다. 존경 받는 재벌이 많지 않지만, 그들의 부유한 삶이 부럽고,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고, 그리고 그들을 입방아에 올리고 싶기도 한 대중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