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인물의 삶을 관찰할 수 있는 초상화전이 잇달아 열리고 있다. 초상화가로 잘 알려진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페이튼의 전시는 그 중 하나다. 비틀스 멤버인 존 레논,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 등 유명 인사들을 그려 세계적 주목을 받았던 페이튼은 “사람의 얼굴에는 시간, 역사, 개성 등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말하며, 초상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페이튼의 국내 첫 개인전인 이번 전시는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에서 15일부터 다음 달 31일까지 열린다.
페이튼의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작가가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를 보고 영화 속 주인공 양조위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두 남자의 애틋하지만 어긋나는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데, 작가는 주인공의 아픔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림 속 남자는 슬픈 눈을 하고 있고, 그의 아픔은 그림을 타고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밖에도 작가의 자화상을 비롯해 작가가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미국 노예 해방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초상화 등을 볼 수 있다. 선명하고 사실적이었던 페이튼의 이전 그림들과는 다른 점이 있는데,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은 대체로 흐릿하고 추상적 느낌을 준다. 리안갤러리 관계자는 “세밀한 묘사보다는 붓 자국, 선 등을 통해 전체적인 느낌을 드러내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는 대규모 초상화 전시인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가 성황리에 진행 중이다. 전시가 한창인 지난 16일 오후 기자가 찾은 전시실은 관객들로 붐볐다. 이번 전시는 1856년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 전문 미술관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의 소장품을 국내에 소개한 것으로, 미술관이 리모델링에 들어가면서 주요 작품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박물관 관계자는 “이번에 전시되는 78점 중 처음으로 영국 밖으로 나온 게 26점이나 되고,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대표 유물 도록 앞 표지에 실린 14점의 초상화 중 9점이 출품되는 등 좋은 작품이 많이 왔다”고 설명했다. 영국에 가지 않고도 미술관 대표 소장품인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비틀스, 셰익스피어, 데이비드 호크니 등의 초상화를 국내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곳에서는 73명의 화가가 그린 76명의 초상화를 통해 그들의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여왕, 모델, 축구 선수, 패션 디자이너, 과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각자의 자태를 드러낸다. 예컨대 말린 두마가 푸르스름하게 표현한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팝스타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초상화는 어둡고 우울한 느낌을 뿜어낸다. 실제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지난 2011년 영국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으며, 죽기 직전 수년간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의 초상화에서는 아마추어 화가로도 잘 알려진 그의 삶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영국의 화가인 월터 시커트의 작품인데, 시커트는 당시 처질의 집에서 그에게 그림 과외를 해 주던 인물이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처칠이 그림을 선물받자마자 다른 이에게 그림을 줬다는 점이다. 초상화 속 처칠은 머리가 크고 다소 익살스럽게 묘사돼 있다.
전시장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작품(그레이슨 페리의 ‘시간의 지도’)도 인상적이다. 초상화라고 하지만 얼굴은 없고 지도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작가가 인생에서 겪은 각종 사건과 경험, 감정이 담겨 있는 지도다. 작가는 꼭 얼굴이 아니더라도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한 인간의 역사가 담겨 있다면 자화상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박물관 관계자는 "초상화 주인공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며 "무엇이 초상화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8월 1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