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의 악다구니, 부엌 밖 유쾌한 삶… 박원숙이 사는 법 [인터뷰]

입력
2021.06.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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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 등과 노배우 전성시대 이끄는 박원숙
드라마 '마인' · 예능 '같이 삽시다'서 '두 얼굴'로 활약

최근 5개월을 '두 얼굴'로 살았다. 그는 저택에서 안하무인이다. 조금이라도 속이 뒤틀리면 손가락으로 탁자에 놓인 버튼을 눌러 도우미를 불러 놓고 쥐 잡듯 잡았다.

이 재벌가 사모님은 집 밖으로 나서면 딴사람이 된다. 강원 영월, 그는 거동이 불편한 아흔넷 할머니의 참혹한 슬픔을 발견하고 등을 어루만진다. 할머니는 아들을 일찌감치 먼저 떠나보낸 뒤 그 상처에 딱지가 앉지 않은 부모였다. 배우 박원숙(73)이 tvN 드라마 '마인'과 KBS2 리얼리티 프로그램 '같이 삽시다'에서 보여준 정반대의 모습이다.


"'갑질' 뉴스 보며 드라마보다 더 센데?"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윤여정을 계기로 한국 노배우들의 활약이 조명받는 가운데, 박원숙이 요즘 화제의 드라마와 예능을 오가며 다양한 모습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드라마 '백년의 유산'(2013) 등에서 보여준 괴팍한 어머니 연기는 그의 전매특허. 박원숙은 '마인'에서 효원그룹 회장 부인 양순혜 역을 맡아 재벌가의 '갑질'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누가 감히 내 딸한테 크림빵을 던져!" 악다구니를 쓰는 박원숙의 연기에 깜짝 놀라 극에서 둘째 며느리 희수 역을 맡은 이보영은 리허설 중 그 자리에서 주저앉기도 했다. "전에 재벌가 갑질 관련 뉴스를 보며 '내가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것보더 더 센데?' 하고 놀랐는데, 이번에 그 비슷한 역이 들어왔더라고요. 시놉시스(대본 초안) 나왔을 때부터 제작진이 '이 역은 박원숙이다' 했다더라고요." 16일 전화로 만난 박원숙은 "나름의 색깔을 낼 수 있어 즐거운 작업이었다"며 웃었다. 극 후반으로 갈수록 순혜는 소리는 요란한데 정작 속은 텅 빈 '뻥튀기' 같다. 그는 "내가 미친년 속치마 같아"라고 울먹인다. "남편 껍데기만 붙잡고 평생을 산 여자의 설움만 잘 표현하면 순혜의 광기에 개연성이 생길 거라 생각했죠."


"집밥? 잘못 왔어" 51년 '워킹맘'

'마인'에서 박원숙은 재벌가 사모님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머리카락을 한껏 부풀린 가발을 쓴다. 그가 덮는 이불은 무려 2,500만 원. 이렇게 화려했던 배우가 예능 '같이 삽시다'에선 가부장제 바깥에 사는 노년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함께 나오는 박원숙과 김영란, 혜은이, 김청은 모두 이혼을 경험했다. 남편 없이 홀로 생활을 책임져 온 박원숙은 "엄마의 집밥을 먹고 싶다"는 게스트의 말에 "그럼 잘못 왔어"라고 받아친다.

평생 바쁘게 산 박원숙은 자신을 부엌에만 가두지 않는다. 혼자 사는 노년 여자 동료들과 어울려 즐겁게 살고, 때론 남의 상처도 함께 보듬는다. 남해 독일마을에 터를 잡은 박원숙은 유쾌하게 나이를 먹으려 한다. 그런 모습에 프로그램 시청자 게시판엔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멘토 같다'는 글이 올라왔다. "다 옛날에 한 자락씩 하던 사람들이라 뒷얘기도 많아요(웃음). 그런데 며칠 동안 밥 같이 먹고 자다 보면 서로 감출 수가 없고, 이렇게 부딪히면서 모난 곳은 깎이고 동그랗게 되는 거죠. 이렇게 같이 사는 거구나 싶어요."


콜라텍서 춤추는 촬영서..."'디어 마이 프렌즈' 때 모친상"

박원숙은 1970년 MBC 공채 탤런트 2기로 데뷔했다. 51년째 연기 활동을 이어오기까지 굴곡도 많았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공황장애도 앓았다. 차를 몰고 서강대교를 지나다 "땅바닥이 눈에 붙는 것 같아" 간신히 주변에 차를 세우고 기절한 적도 있다. 김혜자 나문희 윤여정 등과 함께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는 즐거운 추억이 됐지만, 촬영 당시 박원숙에겐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는 "촬영 전 어머니 건강이 안 좋아 병원 응급실을 다니다 첫 촬영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하필 콜라텍에서 춤을 추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와중에도 박원숙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영원 역을 애틋하게 연기해 시청자를 뭉클하게 했다.

'마인' 촬영을 끝낸 박원숙은 곧 남해로 내려간다.

"아버지가 만화가(박광현 화백)셨잖아요. 어머니도 끼가 많았어요. 의성어·의태어로 흉내도 잘 내시고. 부모님의 재능을 물려받아 여태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이젠 체력이 좀 버거워요. 일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1년에 한 작품만 하려고요."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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