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의 시간'이 왔다.
범여권 의원들이 16일 차별금지법 제정안을 공동 발의했다. 민주당 의원이 22명이나 참여했고, 스타급 의원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차별금지법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린치 대상이 되는 것을 감안하면, 의원들이 단단히 마음 먹었다는 뜻이다. 의원들은 "올해 가을 정기국회에서 처리하겠다"며 구체적 목표도 설정했다.
차별금지법안이 처음 발의된 2007년 이후 14년은 '좌절의 역사'였다. 이달 14일 국회 국민동의 청원 10만명을 돌파한 것을 계기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등장으로 정치권에 진보·혁신 경쟁이 붙은 것도 우호적인 조건이다.
'모두를 위한 평등'을 위해 한걸음 전진하느냐, 또 다시 후퇴하느냐의 키를 쥔 건 국회 다수당이자 집권여당인 민주당 지도부다.
이상민 민주당 의원은 16일 '평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차별로 인한 피해를 효과적으로 구제하며 차별을 예방함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 의원의 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에서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차별금지법 제정안과 병합 심사를 받게 된다. 지난해 6월 발의된 '장혜영안'은 국회 청원 10만명 돌파에 힘입어 법사위에 강제 회부됐고, '이상민안'이 입법 트랙에 함께 올라타게 된 것이다.
'이상민안'이 '장혜영안'보다 다소 확장됐다는 것이 이 의원 측 설명이다. 우선 보수 개신교 등의 동성애 반대 집회 등을 차별행위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종교계 표심을 의식한 민주당 의원 몇 명이 발의를 포기했다고 한다.
차별금지 영역을 고용과 교육 등 네 가지 분야로 명시한 장 의원 법안과 달리, 이 의원안은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한다'고 못박았다.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모든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법이 적용된다'고 적시한 것은 인공지능(AI) 기술을 악용한 차별과 성폭력 등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다만 '장혜영안'과 달리 형사처벌 조항은 뺐다. 민사상 손해배상은 요구할 수 있게 했다.
'이상민안'의 최대 동력은 공동발의 의원들의 화려한 면면과 화력이다. 이상민 의원부터 민주당의 최다선 의원이다. 국회 법제사법위 간사인 박주민 의원 이름을 올린 것은 법사위 법안 심사에 속도가 붙을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요즘 '뜨는' 대선주자인 박용진 의원도 포함됐다. 그의 참여는 이재명 경기지사를 비롯한 다른 대선주자들의 입장 표명을 압박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친문계 핵심인 홍익표 의원과 여성가족부 장관 출신인 진선미 의원, 열성 지지자가 많은 김용민 의원도 동참했다. 이탄희 권인숙 남인순 양경숙 유정주 이동주 윤미향 최혜영 이수진(서울 동작을) 이수진(비례대표) 박성준 윤영덕 이용빈 송갑석 양이원영 이재정 민주당 의원과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 무소속 김홍걸 의원도 법안에 서명했다.
문제는 법안 처리 과정에서 '표 계산'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하는 것은 개신교 표를 사실상 포기하는 일이다. 차별금지법안은 2007년 이후 6차례 발의됐지만 처리는 매번 무산됐다. 20대 국회에선 발의조차 되지 못했다.
공동발의 의원들을 겨냥한 공격은 이미 시작됐다. 각 의원실엔 협박 전화와 문자메시지, 팩스 등이 쇄도하고 있다. 한 의원실에 발송된 팩스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차별금지법이 있는 나라엔 한집 건너 한집에 동성애자가 산답니다." 이상민 의원은 "돌멩이와 자갈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송영길 대표와 윤호중 원내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가 차별금지법 추진을 당론으로 정하는 '결단'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장혜영 의원은 "민주당 의원들의 발의를 높이 평가한다"면서도 "당론으로 힘있게 추진하지 않는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