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체면과 평판을 중시하는 나라다. 어딜 가도 고개를 쉽게 숙이지 않고 남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굳건한 유교적 사고방식에다 인민의 다중평가로 체제가 유지되는 사회주의까지 결합됐으니 이해할 법도 하다. 그런데 이런 베트남이 지난달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구매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외 기업들에게 공개적으로 손을 벌리고 있다. '많이 다급했나 보다'라고 쉽게 조롱할 일이 아니다. 자부심 강하기로 동남아에서 손꼽히는 베트남 중앙정부가 체면과 평판을 내려놓은 것은 그만큼 전염병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가 발현된 탓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베트남은 지난 7일 코로나19 백신 자체 개발의 최종 절차인 3상 임상시험에 돌입했다. 첫 작품을 보완할 또 다른 자체 백신 3종에 대해서도 순차적으로 임상시험을 하는 중이다. 중국처럼 독자적 기준으로 개발을 강행하지도 않는다. 네 종류 모두 국제 의학 기준을 따르며 각종 검증을 빠짐없이 받고 있다. 애초 기대와 예상이 모두 맞아떨어진다면 베트남의 자체개발 백신은 이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초 상업생산과 접종이 가능할 전망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여전히 "미국과 함께 'G2'(주요 2개국)로 불리는 중국이 만든 백신도 믿기 힘든데, 더 작은 공산국가인 베트남 백신이 뭔 의미가 있냐"라며 의구심을 보낸다. 지난해 명목상 1인당 국민총생산(GDP)이 3,498달러(한화 391만 원·세계 117위)에 불과한 베트남이 끝까지 완주나 하겠느냐는 의미다. 여기엔 1인당 GDP가 3만1,497달러(3,524만 원·25위)로 약 10배인 한국도 어려워하는 백신 자체개발을 개발도상국이 완수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무시'도 보태졌다. 과연 그럴까. 베트남 특유의 정치적 선전전을 걷어내고 객관적으로 확인된 부분만 살펴보면 답은 나온다.
프랑스 식민지배를 경험한 베트남엔 뜻밖의 유산이 있다. 세계 최초로 백신을 개발한 파스퇴르 연구소의 베트남 분소가 1895년 중남부 냐짱에 설립된 것이다. 2004년에 세워진 한국 파스퇴르 연구소와는 무려 109년의 차이다. 그저 오랜 역사만 있는 게 아니다. 베트남 파스퇴르 연구소는 디프테리아와 뎅기열 등 동남아의 고질적 풍토병에 대한 신규 백신 개발은 물론, 현지 전문가 육성과 교육에도 힘써 왔다.
풍부한 경험과 인적 자원, 데이터 축적은 독자적 백신 개발 성과로 이어졌다. 베트남은 현재 독감·결핵·홍역·로타바이러스 등 11개 질병의 백신을 성공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백신 완제품 자체 생산은 아시아에선 일본과 인도, 중국에 이어 네 번째다. 2015년엔 세계보건기구(WHO)도 "베트남 백신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보장한다"고 발표했다. 덕분에 개발도상국임에도 8조 원 규모인 자국 제약 시장의 47%는 베트남산이 점유하고 있다. 당연히 베트남이 개발 중인 네 종류의 코로나19 백신 모두 자국 시설에서 생산될 예정이다.
약소국의 코로나19 백신 개발은 제이슨 맥렐란 미국 텍사스대 화학과 교수가 지난해 5월 전 세계에 공유한 '헥사프로(HexPro) 유전자' 기술이 다양하게 파생된 덕이 크다. 베트남은 이중 헥사프로를 닭에 감염되는 뉴캐슬병 바이러스에 끼워 넣어 생산하는 길을 택했다. 이전에 만들었던 독감 백신과 마찬가지로 달걀을 통한 대량 생산이 가능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개발 선봉엔 베트남 제약 기업 나노젠과 육군 의학대학이 섰다. 이들이 만든 베트남 첫 코로나19 백신 '나노코백스'(Nano Covax)는 지난달 1·2차 임상시험을 통과한 뒤 현재 3차 임상이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나노코백스 샘플은 작년 10월 뉴캐슬식 백신을 처음 개발한 미국 마운트 시나이 이칸 의대 측으로부터 "코로나19 바이러스 차단 효과가 확인된다"는 회신도 받았다. 1·2차 임상시험 데이터를 확인 중인 WHO와 국제 보건의학계도 과학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WHO는 지난 4월 베트남을 '백신 안정 생산 국가'(3등급)로 격상시켰다.
나노코백스의 예방률 달성 최종 목표는 85~90%다. 관건은 '백신 개발의 최대 고비'라는 확진자 등 고위험군 대상 시험이 예정된 3차 임상이다. 나노젠은 이와 관련, 필리핀 등 다수 국가에서 해외 시험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자국 내 데이터만으로 예방률 신뢰 확보가 안 될 경우에 대비하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3차 임상은 워낙 변수가 많아 지금은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고 한다.
또 다른 자체 백신 3종은 '판단 유보' 상태다. 1차 임상 중인 코비백(Covivac)은 물론, 바바이오테크(VABIOTECH·Vaccine and Biological Products Company Limited)와 베트남 백신생명공학연구센터의 신규 백신 등에 대한 핵심 정보들은 아직 노출되지 않은 탓이다. 현재 코비백 측은 "동일 성능으로 백신 판매가를 절반으로 낮출 수 있다"고, 바바이오테크는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대항력이 우수하다"고 각각 강조하고 있다.
베트남은 여전히 현대적 상하수도 시설이 부족하다. 자연히 백신 생산 과정의 위생·안전성 문제가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이에 베트남은 지난해 12월 나노코백스 생산 시설을 공개하며 반박에 나섰다. 우선 전체 생산 공정에서 인간의 손길이 닿는 곳은 두 지점으로 확인됐다. 첫 번째는 연구자들이 백신용 스파이크 단백질 등 주요 물질을 정밀 배양해 검사한 뒤, 자동화 생산라인으로 넘기기 전의 과정이다. 두 번째는 자동화 작업 종료 후 불량품 검사 구간이다. 모두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다.
자동화 생산라인은 컨베이어 벨트를 기초로 제작됐다. 라인당 1회 생산 물량은 3,000병이며, 백신 용기 세척과 소독·적정량 주입·라벨링 등이 순차적으로 이뤄진다. 모든 과정은 특수작업복을 입은 전문 인력들이 모니터링한다. 현장을 점검한 WHO 등은 글로벌 거대 제약사 백신 생산 과정과 큰 차이가 없다고 평가했다. 적어도 병에 들어갈 액체의 과학적 효능만 검증되면, 이를 안전하게 넣어 공급하는 건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과학적 조건을 충족하더라도 백신 생산 상용화를 위해선 각국의 산업적·정치적 변수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제약사가 안정적 판매망 구축의 어려움과 정책적 보호 부실로 임상 중 개발을 포기한 바 있다. 이 부분에서 국가 개입이 보편화한 베트남은 제법 안정성을 보인다. 비록 당장은 체면을 구기며 외국 백신 구입에 전력하고 있지만, 중앙정부는 자체 백신을 통해 모두 상쇄하겠다는 의지가 굳건하다. 박기동 WHO 베트남소장은 "중앙정부가 백신 개발 성공을 국가 과제로 보고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집중적으로 힘을 싣고 있다"며 "최종 승인 여부를 예상하긴 어려워도 백신 개발이 중도에서 멈출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나노젠 측도 "문제 발생 시 모든 짐을 보건부가 떠안는 구조여서 속도를 내려 해도 오히려 중앙정부가 더 까다롭고 보수적으로 접근한다"며 "생산 공정 자체도 수익과 물량 생산 최대화가 아니라, 합리적 가격으로 자국민들에게 꾸준히 백신을 공급하도록 설계됐다"고 밝혔다. 나노코백스의 최대 생산 물량은 7,000만 회분가량이고, 코비백은 3,000만 회분 정도다.
이 모든 노력이 결실을 맺을지, 좌절로 끝날지 현재로선 예측하기 힘들다. WHO의 최종 승인은 과학적 성취 여부로만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베트남 자체개발 백신이 '원산지' 때문에 일방적으로 무시받을 수준은 아니라는 점이다. 변이를 거듭하는 코로나19와 인류의 공존 가능성이 점점 커지는 이때, 자체 백신 개발은 더 커다란 화두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