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영정을 들고, 마스크와 챙 넓은 모자로 표정을 가린 아버지가 장례식장을 걸어나왔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려 얇은 바지가 팔락거렸다. 세 걸음을 채 못 뗐는데 아버지 입에선 울음이 새 나왔다. 신음 같던 소리가 점차 선명해졌다. "아들아, 내 아들아. 예쁜 내 아들아." 아버지 품에 안긴 액자에서 아들은 그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광주광역시 철거 건물 붕괴 참사가 벌어진 지 엿새째인 14일, 희생자 9명 중 마지막 2명의 발인식이 엄수됐다. 가장 어린 희생자인 고등학교 2학년 김모(17)군의 발인은 이날 오전 9시 30분쯤 동구 조선대병원에서 진행됐다. 이용섭 광주시장, 장휘국 광주시교육감, 임택 동구청장 등이 참석해 헌화했다.
오전 8시가 채 안 된 이른 아침부터 김군 빈소에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찾아왔다. 김군과 함께 교내 음악 동아리 활동을 하던 친구들이었다. 서너 명씩 모여 차분하게 조문하고 식사하는 동안 대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는 장례식장 밖으로 나와 뙤약볕에 엉거주춤 서서 발인식을 기다렸다.
발인실 문을 통해 김군의 관이 나오자 운구를 맡은 학생 8명은 흰 장갑을 끼고 묵묵히 관을 들어올렸다. 밖에서 기다리던 학생 20여 명이, 상복도 챙겨입지 못한 채 아들 영정을 들고 울부짖는 아버지 뒤를 가만히 줄지어 따라갔다. 묵념이 끝나고 김군의 관을 실은 영구차가 사라져가는 걸 바라보던 친구 A군은 말했다. "그냥 멍해요. 안 믿겨요."
김군은 생전 가족과 친구를 살뜰히 챙기는 밝은 학생이었다. "평소 눈에 띄지 않던 나를 일부러 잘 챙겨줬다"고 죽은 친구를 추억한 B군은 영구차가 떠나자 울음을 터뜨렸다. 김군은 지난 9일 집에서 비대면 수업을 마치고 동아리 관련 논의를 위해 학교에 다녀오다가 사고를 당했다. 사고 직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버스 탔어요. 집에서 만나. 사랑해"라는 말을 남겼다.
이번 사고를 두고 해체계획서부터 부실하게 작성됐고 불법 재하도급 속에 그 계획마저 지켜지지 않는 등 인재(人災)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김군의 친구들은 앞으로 우리 사회를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A군은 "어른들이 만든 이곳에서 우리가 안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언제든 친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만 커졌다"고 말했다.
어른 세대 역시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김군 발인식을 지켜보던 60대 이모씨는 "사망자 규모가 다르지만 자꾸만 세월호 참사가 생각난다"며 "기본 원칙만 잘 지켰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라서 더 미안하고 무력감이 든다"고 말했다.
유족은 당초 김군이 다녔던 초중고교를 상여를 메고 들를 계획이었지만, 다른 학생들의 트라우마가 심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영구차로 학교 근처를 지나가는 것으로 이승에서의 '마지막 등교' 의식을 치렀다. 이날 비슷한 시간 다른 사망자의 발인식이 진행돼 희생자 9명의 개별 장례 절차는 모두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