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원(가명)씨는 지난달 20일 푸른나무재단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의 도움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학교폭력 피해자로는 처음으로 그는 언론 앞에서 자신의 피해 경험을 털어놨다. 김씨는 고등학생 2학년 때 언어폭력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죽음은 면했지만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까지 학교에서 그를 도와준 이는 없었다. 김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학교 선생님에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그냥 넘어가자’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외면 이후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고 느낀 김씨는 그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피해를 극복하고 용기 내 나온 기자회견 자리에서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당시 담임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던 점이 아쉽다”고 털어놨다.
올해 20살인 가영(가명)씨 역시 중학교 3학년 때 학급 내에서 언어폭력에 시달렸다. 이름의 초성으로 별명을 지어 부르는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 장난으로 받아들였지만 놀림의 정도는 갈수록 심해졌다. 가해 학생들은 칠판에 공개적으로 그림을 그려 가영씨를 특정하거나 수업 중에는 대뜸 별명을 외치기도 했다. 가영씨에게 더 이상 장난이 아니었다. 가영씨는 고민 끝에 학교폭력대책위원회를 열고 싶다며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의 중재는 없었다. 그는 “당시 학교로부터 받은 보호나 대처는 전무했다”고 했다. 가영씨 부모님이 직접 나서 가해 학생 학부모에게 연락했고 무리 중 단 한 명에게 사과문을 받았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도 학교폭력의 기억은 잊히지 않았다. 가영씨는 당시 겪은 피해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다른 식으로 대처했으면 나았을까 자책하기도 했다. 주변 친구든 선생님이든 단 한 명이라도 그 장난을 멈추라고 했더라면. 성인이 된 후에도 가영씨에게 그 학교는 여전히 불편한 곳으로 남아있다.
수년 전 학교폭력으로 고통받던 두 사람 모두 학교장과 교직원의 대처가 없었던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2021년 현재도 여전히 학교폭력에 대해 학교장 등의 대처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4월 20일 청소년 NGO 푸른나무재단이 기자회견에서 공개한 학교폭력과 사이버폭력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학교폭력을 겪는 피해학생의 18.8%가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부모의 도움 받음’이 25%로 가장 많았고, ‘선생님의 도움 받음’은 24.2%로 뒤를 이었다. 4명 중 3명은 여전히 학교에서 폭력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은 담임교사나 부모님 같은 어른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교육부가 제공한 2020년 학교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초, 중, 고를 통틀어 학교폭력 피해 사실을 제일 먼저 알린 사람은 보호자나 친척이 45.3%, 학교 선생님은 23%로 뒤를 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학교폭력이 발생해도 교사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거나 개입을 꺼리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4월 청와대 국민청원엔 한 학부모의 글이 올라왔다. 충북 제천의 한 중학교에서 1년 동안 학교폭력 피해를 입은 학생에 대해 교사들이 폭력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가해학생들은 피해학생에게 제설제를 먹이거나, 손소독제를 손에 뿌리고 불을 지피는 등 가학적인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피해학생이 교사를 찾아 어려움을 호소했지만 6명의 가해학생들은 교사나 학교로부터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학생이 임원이거나 학업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학교는 폭력을 저지른 일부 학생들을 두둔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학교폭력예방법 제20조에 따르면 학교폭력을 인지할 경우 교원은 학교의 장에게 보고하고 해당 학부모에게 알려야만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학부모가 나서기까지 문제를 해결하려거나 피해 학생을 보호하려는 교사들의 도움은 보이지 않았다. 충북교육청 행복교육센터의 나광수 센터장은 “교육청에 학부모가 신고하기까지 학교로부터 어떤 보고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피해학생이 폭력의 두려움으로 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동안 가해학생들은 버젓이 일상생활을 이어갔다. 학부모의 신고에 따라 교육청이 비로소 움직였고 분리조치를 내렸다. 가해학생 6명은 지난 21일 학교폭력대책심의위를 통해 전학과 함께 5시간 특별교육이수 조처를 받았다. 피해학생은 현재 학교에 나오지 못한 채 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가해학생들은 조처가 시행될 때까지 학교에 다니고 있다.
피해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을 보호하고 안정시키는 것도 교원이 해야 할 일이다. 지난 3월 개정된 2021년 학교폭력 사안처리 가이드북 역시 교사는 심각한 신체폭력이 아닐지라도 학교폭력의 조짐이 있거나 발생을 목격할 경우 보호자나 해당 학교에 통보하거나 교육청에 보고나 신고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학교폭력 대처 과정에 선생님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한정적이다.
충남의 한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교사 B씨는 “학교폭력 전담교사도 사안 처리에 개입하는 부분이 사실상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발견된 폭력을 보고하거나, 학생의 진술서를 받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정도다. 학교폭력 전담기구인 심의위로 폭력사안이 회부되면 개별 교사는 추가적인 조처를 취할 의무가 없다. ‘학교폭력 전담 교사’는 그저 행정적 절차를 수행하는 데서 멈춰야 한다.
또 교사는 학교폭력을 목격한 신고자라 하더라도 심의위가 열리는 동안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를 규정할 수 없다. 피해 장면을 목격해도 교사는 심의위 결정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 피해학생 학부모였던 '더나은미래연구소' 이해준 소장은 “폭력에 따른 상처를 온전히 피해학생과 그의 가족이 감당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폭위에서 결정이 나기까지 가해학생과 피해학생을 분리한다는 것 자체를 현장에서 부담스러워한다”고 말했다.
실제 피해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교사의 의무는 가이드북에서 찾기 어렵다. 학교폭력 피해자에 관한 조처는 오로지 심의위에서 도맡는다. '따돌림사회연구모임' 소속 강균석 교사는 “학교폭력 피해자를 위해서 학교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건 현재 따로 정해진 것이 없다”고 했다. 피해학생 보호를 위한 교사의 구체적인 역할이 제도에서 빠져있다 보니 피해학생들이 호소할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역할은 학교폭력 해결 과정에서 필수적이다. 강지연 하늘빛 정신의학과 의원 미술치료사는 “학교폭력을 호소하며 센터에 온 아이들 중에 회복이 잘된 경우는 대부분 선생님들이 중재를 하며 화해의 장을 마련한 사례”라고 말했다. 그러나 강 치료사가 만난 다수의 학생들은 학교폭력을 겪는 와중에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 그는 “아이들은 가해자, 피해자로 나뉘지만 어른이 개입된 것만으로도 이성적으로 변화하고 수습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교사들은 섣부른 개입으로 민원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아예 사안 자체를 외면해버리는 현상이 벌어진다. 교사가 학교폭력 문제를 조사하는 등 사안에 개입할 권한이 모호하기 때문에 아예 손을 놓는 교사들이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