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를 마치며>갈 곳 없는 12인의 이야기
‘철거민’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시나요. "자기 땅도 아닌 세입자면서 뭘 달라는 거야?" "버텨서 보상 더 받으려는 거잖아." 용산참사의 비극도, 셋방에서 쫓겨나 자살한 30대 세입자 사건에도 이런 조롱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자본주의의 첨병인 미국에서조차 토지 개발 시 ‘동등한 대체주택 제공 없이는 이전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세입자의 기본 권리라는 점을요. 땅 주인, 건물 소유주만 '사람' 취급 받는 한국과 달리, 영국에서는 세입자도 재개발 주민투표에 참여합니다.
한국은 어떤가요. 개발로 인한 그림자를 보듬어 줄 제도가 거의 없습니다. 개발 자체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이 그림자도 함께 돌아보자는 겁니다.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은 ‘21세기 난쏘공’ 기사를 준비하며 개발을 앞두고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수십년 간 그곳에서 살거나 일해 온 이들은 빠르면 몇 개월 안에 사는 곳, 일하는 곳을 떠나야 합니다. 대부분 어디로 갈지조차 모르는 상황입니다. 더 괜찮은 곳으로 갈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요.
우리가 만난 12명의 이야기입니다.
신길선 (89·가명)
사는 곳 : 경기 광명에서 30여년 째 거주
이주하는 이유 : 광명 뉴타운 재개발 12구역 철거 예정
이주 예정지 : 미정
“여기 판자촌을 방 한 칸에 (보증금) 500만원 주고 들어왔어요. 나가야 된다고 하는데... 애들도 60대 노인들이고 형편이 어려워서 같이 못 살아요. 나갈 데도 모르고, 몰라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저 여기서 머물러서 사는 동안 있는 거예요. 갈 곳이 없으니까 막막하죠. 죽는 것도 어렵네요. 사는 것도 어렵고…”
박희석 (79·가명)
사는 곳 : 경기 광명에서 20여년 째 거주
이주하는 이유 : 광명 뉴타운 재개발 12구역 철거 예정
이주 예정지 : 미정
“원래 광명 소하동 판자촌에 세 들어 살았어요. 근데 몇 년전에 큰 도로(강남순환도로) 생긴다고 쫓겨났어요. 여기(철산 3동 반지하 전세)로 왔는데 또 뜯긴다고 하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새로 생기는 아파트는 꿈도 못 꾸고… 주인이 나가라면 나가야 되는 건데. 아무도 없는 시골에나 가서 살까 싶어. 아주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살다가 죽을까 싶어.”
김선이 (79·가명)
사는 곳 : 경기 광명에서 50여년 째 거주
이주하는 이유 : 광명 뉴타운 재개발 11구역 철거 예정
이주 예정지 : 광명 5동 연립주택. 5년 내 철거 예정
“사기로 집 잃고 10년 전부터 전세 살았어요. 그런데 5년 전에 광명 뉴타운 재개발 철거한다고 이사하고, 작년에 살던 데도 헐린대서 또 나왔어요. 근데 지금 사는 데도 헐린다네요. 세 번째에요. 복덕방에서는 계약할 때 또 헐린다고 말도 안 해줬어요. 네 번째로 이사가는 데는 도로가 생긴대요. 5년 안에 헐리다고 하는데 그 때 또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어요.”
홍정희(61)
일하는 곳 : 서울 명동에서 28년째, 지금 상가에선 16년째 세 들어 꽃집 운영
이주하는 이유 : 상가가 명동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 제2지구로 지정됨
이주 예정지 : 미정
“우리 딸 여섯 살 때, 딸 세례명 딴 지금 꽃 가게 열어서 16년 간 애들 뒷바라지 했어요. 근데 재개발한다고 나가라네요. 우리나라 법(상가건물 임대차 보호법)은 10년 넘게 장사한 오래된 가게는 아무 소리 못하고 비워주게 돼 있어요. 여기서 벌어서 여기서 먹고 사는데 갑자기 나가라고 하면 대책이 없죠. 주변 가게들도 예순 넘은 여자들이 혼자 장사하는 데가 대부분이에요.”
강성진(45)
일하는 곳 : 8년째 서울 명동에서 세 얻어서 일식집 운영
이주하는 이유 : 명동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 제2지구로 지정됨
이주 예정지 : 미정
“재개발로 건물이 밀리고 문화 공원이 생긴대요. 그런데 건물주는 ‘재건축 한다’고 나가래요. 법적으로 재건축 할 때는 건물주가 세입자의 임대차 계약갱신을 거절할 수 있고, 세입자한테 보상도 안 해줘도 돼요. 결국 보상 안 해주려고 저러는 거죠. 이제 언제 가게가 철거될지 몰라요. 이런 일은 겪어본 적도 없고… 어디 가서 누굴 붙잡고 하소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해옥(60)
일하는 곳 : 13년동안 경기 구리에서 세 얻어서 여관 ‘성일장’ 운영
이주하는 이유 : 구리인창C구역 재개발정비사업으로 건물 철거
이주 예정지 : 미정
“최소한 ‘수평이동’은 가능하게 해줘야죠. 성일장이 딸이랑 살아가는 집이자 일터였어요. 집 수리도 직접 다 했고, 꽃나무 묘목 하나 제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어요. 그런데 무작정 재개발을 할 테니 몇 푼 쥐어주고 그냥 나가라고 하면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김경석(가명·62), 김수연(가명·60)
일하는 곳 : 5년 동안 경기 구리에서 세 얻어서 ‘전주밥상 전라도 정식’ 식당 운영
이주하는 이유 : 구리인창C구역 재개발정비사업으로 건물 철거
이주 예정지 : 미정
“5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겨우 번듯한 식당 키워냈는데... 하루 아침에 나가라는 거에요. 보증금 1,500만원에 월세 90만원 냈었어요. 이 돈으로는 주변에 식당 새로 얻기도 어렵고 기껏 얻은 단골들도 다 잃게 생겼고요. 평생 시위같은 건 생각도 안 해보고 살았는데 이렇게 내가 나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김현자(가명·64)
일하는 곳 : 38년간 경기 남양주시에서 땅 빌려서 농사 지음
이주 이유 : 3기 신도시 개발로 빌린 땅이 강제 수용됨
이주 예정지 : 미정
“남양주에서 38년을 땅 빌려서 농사 짓고 살았어요. 비닐하우스에 열무, 배추, 대파, 시금치, 얼갈이 번갈아 심으면서요. 그런데 정부가 아파트 짓는다고 이 땅을 강제로 수용한대요. 우리는 땅이 없으니 토지 보상은 못 받고 농업손실보상만 받아요. 근데 그 돈이 실제 수입의 5분의 1밖에 안돼요. 개발된다니까 주변 땅값 다 올라서 이제 근처에선 땅도 못 빌리고요. 30~40km 더 먼 여주, 포천으로 가야되는데 그러면 또 채소 유통비가 늘어나지요…”
송한준(72)
일하는 곳 : 52년간 경기 남양주시에서 축산업을 함
이주 이유 : 3기 신도시 개발로 땅이 강제 수용됨
이주 예정지 : 미정
“560평 토지에서 소 60마리를 키우고 있어요. 보상금 받는다 해도 축사를 딴 데로 옮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주민들이 축사 신축에 동의를 해줘야 지자체가 허가를 내주는데, 포천 가서 주민들 물어보니 동의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이 많은 소를 데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폐업하면 소를 마리당 시세보다 100만원은 싸게 팔아야돼요. 이러나 저러나 너무 막막해요.”
오재웅(54)
일하는 곳 : 17년간 경기 고양시에서 화훼업 종사
이주하는 이유 : 3기 신도시 개발로 임대한 땅이 강제 수용됨
이주 예정지 : 미정
“땅 140평을 빌려서 화초를 팔고 있어요. 영업손실금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지만 1,000만원 정도 될 것 같아요. 근데 주변 땅값이 다 올라서 이제 토지주들이 화훼업에는 임대를 안 주려고 해요. 임대준다해도 임대료 감당이 안되고요. 사람들을 이주시켜 놓고 개발을 해야지, 지금처럼 ‘선 개발 후 이주’를 하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개발 다 될때까지 4,5년간 어디서 영업을 합니까.”
최상필(가명·54)
일하는 곳 : 10년간 경기 고양에서 개인사업
이주 이유 : 3기 신도시 개발로 소유토지 강제수용
이주 예정지 : 미정
“원래 고양 향동지구에서 사업을 했었어요. 근데 10년 전에 재개발되면서 땅이 강제 수용 돼서 창릉으로 왔어요. 그나마 여긴 땅 사놓은 게 있어서 토지 보상은 받을 수 있는데 보상금이 실거래가 절반밖에 안돼요. 보상금으로 여기서 다시 땅 사려면 절반밖에 못 사는거죠. 일 잘 하고 있는 사람들 땅 강제로 뺏아서 나가라면서 보상도 제대로 안 해주는 거죠. 땅 팔고 싶어서 파는것도 아닌데 양도세까지 내라니까 정말 화가납니다.”
박한규(가명·77)
사는 곳 : 14년간 경기 남양주 진건문화마을에 거주
이주 이유 : 3기 신도시 개발로 땅이 강제 수용됨
이주 예정지 : 미정
“원래는 진관리 법골에서 세 들어살았어요. 비가 새는 집인데 주인은 고쳐주지도 않았고요. 그러다가 정부가 국가예산 투입해서 ‘진건문화마을’ 조성한다고 해서 1억 정도 대출 받아서 집 지어 이사왔어요. 그 때가 2007년인데 아직도 대출금을 다 못 갚았어요. 국가 믿고 대출 받아서 집 지었는데, 이제 정부가 또 집을 뺏어가려고 하네요.”
◆21세기 난·쏘·공 : 글 싣는 순서
<1>살 곳 없는 세입자들
<2>생계 잃은 농민들
<3>내몰리는 상인들
<4>한국식 폭력적 개발 언제까지 · 시리즈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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