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쫓겨나지 않겠다"… 손 잡고 33억 건물주 된 시민들

입력
2021.06.1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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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시민 출자로 건물 매입해 시민공간 조성
6월 말 정식 개관…1, 2인 가구 '공동주택'도 구상 중
국내도 건물 공동 소유·운영 '시민자산화 운동' 확산

부동산 가격 급등은 자영업자·서민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다. 덩달아 오르는 임대료 탓에 애써 가꾼 터전을 떠나 변두리로 밀려나는 전월세 난민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공익을 위해 일하지만 돈 나올 구멍은 없는 시민사회단체 사정도 다르지 않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둥지 내몰림) 피해에서만큼은 철저한 '을'의 처지다. 아무리 좋은 뜻이 있어도 그걸 펼치려면 공간이 필수적인데, 매번 건물주에 떼밀려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니 지속가능한 활동이 어렵다.

해빗투게더협동조합(해빗투게더)은 '쫓겨나지 않는 시민 공간'을 표방하며 갑을로 나뉜 부동산 시장에서 유쾌한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 시민들이 십시일반 추렴한 돈으로 지난해 11월 33억 원짜리 5층 건물을, 그것도 부동산 시장의 철옹성이라는 '마용성(마포·용산·성동)' 중 하나인 서울 마포구에 마련했다. 조합은 이곳에 '모두의 놀이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직 한국에서는 개념도 생소한 '시민자산화' 운동의 첫발을 내딛은 해빗투게더는 지난달엔 공간조성을 위한 운영비 6,000만 원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시중은행의 예금 금리보다 높은 연 3%의 이자율을 지급하는 대출형 펀딩으로 사회가치기금 등과 연계, 시민사회운동에 금융을 결합한 새로운 시도다.

더는 쫓겨나지 않는 시민 공간

지난 9일 찾아간 마포구 성산동 모두의 놀이터에는 이미 시민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2층 커뮤니티 라운지 겸 카페에선 생활협동조합원들이 지역사회 통합돌봄 프로젝트를 두고 열띤 논의를 하고 있었고, 3층 공유사무실에서는 한 시민이 작업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아직은 해빗투게더 조합원 위주로 시범 운영하고 있지만, 이달 말엔 정식 개관해 외부에 개방할 예정이다. 연말쯤엔 다른 층에도 복합문화공간, 커뮤니티 펍, 스튜디오, 파티룸 등이 마련된다.

해빗투게더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로 어려움을 겪어오던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홍우주사회적협동조합·삼십육쩜육도씨 의료생활협동조합 세 단체가 2018년 12월 의기투합하면서 설립됐다.

우리동네나무그늘의 경우 2011년부터 마포구 염리동에 카페를 열어 마을공동체를 일구다가 2017년 초 턱없이 높은 임대료 인상으로 인근을 전전해야 했던 뼈아픈 경험이 있다. 우리동네나무그늘을 지켜온 박영민(42) 해빗투게더 상무이사는 "그냥 커피를 파는 카페라기보단, 수천 명이 모이는 마을축제를 열고 공동육아센터 및 공동체은행을 만드는 등 이웃을 연결하는 장소였다"며 "주민사랑방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자 건물주로부터 압박이 들어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240만 원으로 시작했는데 5년이 지나자 보증금 1억 원에 월세 350만 원을 요구했다"며 "명도소송까지 겪으면서 지속가능한 도심 커뮤니티에 대해 고민하다 주민들과 건물을 공동 소유하는 방안에 주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홍대 문화예술인들이 모인 홍우주사회적협동조합 역시 수많은 라이브클럽과 공연장이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는 것을 지켜봤다. 삼십육쩜육도씨 의료생활협동조합은 홍대 앞에서 공동체 주치의 역할을 자처해왔다. 상담과 치유를 기반으로 30분간 세심하게 진료한다는 방침 아래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30분 의원'이 그 산물이다. 이들 역시 천정부지로 치솟는 임대료에 지역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연남동, 대흥동으로 수차례 옮겨다니며 안타까움을 삼켜왔다.

시세차익이나 임대수익이 아닌,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건물주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세 단체가 해빗투게더를 결성해 시민자산화 운동을 추진하는 동력이 됐다. 시민자산화는 다수의 시민이 공동 건물주가 되고 공간 운영 방안에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모델이다.

해빗투게더는 지난해 두 차례 조합원 모집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해 자기자본 3억여 원을 마련했고, 여기에 행정안전부(농협은행)와 서울시(신협)의 지원으로 대출받은 30여억 원을 보태 현재 건물을 샀다. 시민들은 적게는 20만 원부터 많게는 500만 원까지 출자하며 호응했다. 현재 조합원은 개인 300여 명, 지역단체 40여 개에 이른다.

조합원들은 건물을 공동 운영하고 여기서 생기는 이익은 공동체를 위해 재투자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조합원에겐 리워드 개념으로 모두의 놀이터에서 판매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멤버십 '히트코인'을 출자금에 따라 일정 비율로 지급한다. 건물 내에는 조합원 전용 공간도 마련된다.

해외는 이미 시민자산화 정착


해빗투게더를 결성하기 전 세 조합은 우리동네자산TF를 만들어 '시민자산화의 성지'로 꼽히는 영국 런던으로 연수를 떠났다. 런던 외곽 넌헤드 지역의 '아이비 하우스 펍(The Ivy House Pub)'은 1930년대부터 크고 작은 마을 행사를 여는 등 지역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장소였으나, 재개발 사업으로 부동산 가치가 뛰면서 2012년 건물주로부터 매각을 통보받았다. 이에 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주민 371명이 투자자로 나서 이듬해 펍을 매입했다. 영국 최초의 공동체 협동조합 소유 펍이다.

시민자산화 방식으로 공동체토지신탁(CLT)이 이용되기도 한다. 리버풀의 '그랜비 4 스트리트(Granby 4 Street)'의 경우 1980년대 낙후 지역 재개발로 유서 깊은 건물들이 철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민들이 CLT를 만들어 자금을 모으고 스스로 재개발을 진행해 도시 재생에 성공한 사례다. 역시 재개발로 문을 닫을 위기를 맞자 주민들이 CLT를 조성해서 살려낸 리버풀 안필드 지역의 동네 빵집 '홈베이크드(Homebaked)'도 유명하다.

한국도 곳곳에서 시민자산화의 움이 트고 있다. 전남 목포에서는 건해산물상가거리 상인회를 주축으로 건맥1897협동조합이 결성돼 도시재생을 이끌고 있다. 2019년 신도시 조성으로 원도심 상권이 침체되자 머리를 맞댄 상인들은 건어물과 맥주를 테마로 한 '건맥축제'를 개최했고 6,000여 명이 몰려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주민 100여 명이 출자해 3층 규모 건물을 매입, 마을 펍과 마을 호텔을 모델로 삼아 '1897 건맥펍' '건맥스테이'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강서구 단체들이 모인 사람과공간협동조합 또한 올해 4월 3층 규모 건물을 매입하면서 시민자산화 첫 삽을 떴다.

"부동산 새 문법 함께 만들었으면"


해빗투게더의 첫 건물명은 모두가 주인이 되는 공간, 모두의 놀이터가 되는 공간을 지향하며 지어진 이름이다. 모두의 놀이터가 지향하는 가치는 크게 4가지로 △제로웨이스트 등 공존을 위한 '생활방식(Life Style)' △소수자 차별금지 등을 지지하는 '태도(Attitude)' △창조의 근원이자 해방감을 주는 '놀이(Play)' △연대와 협동 활동을 뜻하는 '워크(Work)'가 있다. 철제로 된 테이크아웃 컵을 빌려주고 반납하는 방식의 '리턴 컵(Return Cup)' 등 캠페인도 계획하고 있다.

해빗투게더의 시민자산화 실험은 현재 진행형이다. 여전히 높은 융자 비율이 숙제로 남은 터라, 상시 조합원을 모집하고 다양한 방식의 펀딩 등 시민이 주인이 되는 자금조달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박 이사는 모두의 놀이터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음 목표는 1, 2인 가구들이 공용공간을 공유하는 공동주택으로 잠정 계획하고 건물을 물색하는 중이다.

그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시작했지만 지금 해빗투게더의 역할은 광장이 사라진 시대에 지역사회 이웃을 연결해주는 일종의 플랫폼"이라며 "아울러 공간 자체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일종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데, 자연스럽게 여러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여러 세대를 거쳐 지역의 자산으로 대물림된다면 시민의 역량이 강화될 것"이라며 "좀 더 많은 동네에 시민자산 공간이 생겨 하나의 흐름으로 한국 사회 부동산의 새로운 문법을 같이 만들어갔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유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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