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 골절됐는데… 경찰 "부상자 없네" 교통사고 조사 안 해

입력
2021.06.16 16:10
유명무실 교통사고 신고의무
경찰, 중상자 발생 모른 채 사고조사 안해
피해자, 1년 뒤 사실 알고 구제받을 길 막막
인적 피해 발생해도 경찰 대신 보험사가 처리
"경찰이 사고 적극 접수해 직접 조사 나서야"

지난해 5월 말, 강원도에서 지인들과 캠핑을 하고 서울로 돌아오던 김모(25)씨는 양양고속도로 터널에서 4중 추돌사고를 당했다. 가해 차량의 운전자 A씨는 김씨의 지인이었고, 해당 차량 뒷좌석엔 김씨와 김씨 남자친구가 있었다. 뒷좌석 에어백이 터지지 않아 김씨는 안면골 분쇄 골절, 치아 완전 탈구, 뇌진탕 등의 중상을 입었다. 사고 발생 한 시간여 뒤 구급차가 도착해 김씨는 인근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코와 다리 등을 다친 김씨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였다.

피해 차량이 폐차될 정도로 큰 사고였지만 운전자 A씨는 에어백 덕에 멀쩡했다. A씨 차량 앞에서 달리던 피해 차량 3대에서도 별다른 인적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치 4주의 중상을 입은 김씨는 수술을 받고 치료와 회복에 전념해야 했다. 부러진 잇몸뼈의 영구적 장애로 평생 먹고 말할 때 불편을 겪게 됐고, 요추와 무릎관절도 손상돼 걷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또 트라우마로 사고 이후 자동차를 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가해자 말 듣고 사건 접수 안 한 경찰

김씨는 수술을 마치고 A씨로부터 "현장에 사고 집계를 하는 고속도로 순찰대가 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김씨와 남자친구가 병원에 이송되고 나서 경찰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사고 조사에 응하고 피해 구제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경찰의 연락은 1년 가까이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A씨의 과속 탓에 사고가 일어났다고 생각했기에, 경찰이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자신을 부르지 않은 점이 더욱 의아했다.

이런 와중에 치료비가 쌓여가고 보험사가 과연 보험금을 순순히 지급할지 불안해졌다. 김씨는 치료비 확보 차원에서 보험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할 요량으로 지난 4월 말 주거지 관할 경찰서를 찾았다가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경찰이 "사고 당일 해당 장소에서 교통사고가 접수된 기록이 없다"고 밝힌 것이다. 경찰은 사고 현장에 출동한 적도 없다고 했다가 말을 바꿨다. 거듭된 확인 요청에도 지난달 31일까지는 "고속도로 경찰대가 출동한 적 없다"고 답하다가 이틀 뒤 "출동은 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사고 접수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경찰 설명은 김씨를 더욱 놀라게 했다. 다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이 그렇게 잘못 판단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현장 조사를 제대로 안한 건 분명해 보였다. 김씨의 요구에 경찰은 뒤늦게 사고 접수를 했지만, 초동 조사도 없이 1년 넘게 지난 사고의 진상을 밝히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당시 고속도로 폐쇄회로(CC)TV 영상마저 보존 기간인 한 달이 지나 지워졌다.

A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경찰이 당연히 사고를 접수해 조사했을 거라고 믿었던 김씨는 절망스러운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A씨는 '인적 피해를 신고하지 않았냐' '거짓말을 했냐'는 김씨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있다. 의대 본과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씨는 현재 대학병원에서 실습을 하고 있지만 부상 후유증으로 몸이 온전치 않고 병동 환자들은 자꾸 고통스러운 사고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의사의 꿈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보험사에 내맡긴 사고 신고·접수

교통사고 처리를 운전 당사자들에게 맡기고 경찰은 소극 대응하는 관행이 사고 피해 구제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법령은 사고 가해자에게 신고 의무를 부여하고 인적 피해가 발생한 사고는 경찰이 직접 조사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이를 가로막는 관행 탓에 김씨와 같은 피해가 구조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16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도로교통법은 교통사고 발생 시 가해 차량 운전자 등이 현장 경찰관이나 가장 가까운 경찰관서에 △사고 장소 △사상자 수 및 부상 정도 △손괴(망가뜨림)한 물건과 손괴 정도 등을 신고하도록 의무화했다. 해당 법령은 가해자에게 피해자 구호와 현장 이탈 금지의 의무도 부과하고 있다.

신고 의무 면책 조건은 '차만 손괴된 것이 분명하고 도로에서의 위험 방지와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한 경우'에 한정됐다. 쉽게 말해 가벼운 접촉 사고로 크게 다친 사람이 없는 가운데 관련자들이 합의한 경우에만 경찰에 신고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교통사고가 나면 신고 없이 현장에서 당사자 간 보험 처리하는 관행이 일상화되다 보니, 인적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도 경찰에 사고 접수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경찰에 신고된 인적 피해 발생 교통사고 건수는 30만9,275건으로, 보험사에 신고된 건수(206만4,869건)의 15%를 밑돌았다.

김씨 사례처럼 경찰이 현장에 오더라도 객관적 사고 조사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김씨는 "중상을 입은 피해자는 보통 구급차에 실려 가장 먼저 현장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며 "현장에 피해자를 대변해줄 사람이 없다면 경찰이 법규 위반 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채 가해자 말만 믿고 '다친 사람이 없다'며 넘어갈 수 있다는 것 아니냐"고 성토했다.

"경찰, 가벼운 사고도 적극 관여해야"

전문가들은 교통사고 발생 단계에서 경찰이 인적 피해 여부를 정확히 조사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뒤늦게 사고 접수나 고소를 하더라도 가해자 혐의 입증이 어려워진다고 지적한다. 한문철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는 "뺑소니가 아닌 이상 신고 의무 조항을 근거로 운전자를 나중에 처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부상을 입은 피해자가 합당한 배상을 받기가 어려워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교통사고 신고가 생략되거나 사건 접수가 적극 이뤄지지 않는 관행이 계속되면 경찰이 운전자 결격 사유 검토, 교통정보 구축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외국의 경우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경찰이 도로 인프라 점검 차원에서 사고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다"며 "보험사에 수집된 정보는 과실을 정확히 밝히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수사기관이 사건 접수를 더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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