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주택들과 마을 내에 녹지가 많아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경기 남양주 진건읍 진건문화마을. 2000년대 정부의 농어촌정비사업 지원을 받아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곳이다.
교통 환경도 좋다. 도보로 20분 거리에 경춘선 사릉역이 위치해 있다. 소문을 들은 외지인들도 하나둘 이 마을로 옮겨와 현재는 49가구, 150여 명이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2019년 정부는 3기 신도시 개발예정지(남양주 왕숙1지구)로 이곳을 포함시켰다. 신도시 예정지의 끝부분에 위치해 제외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데도, 굳이 조성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마을을 강제수용하고 전부 무너뜨리겠다는 것이다.
마을의 분노는 크다. 대부분 노인들로서 여생을 마을에서 보낼 생각이었던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보상도 필요 없다"며 "제발 신도시 예정지에서 빼달라"는 게 주민들의 요구다.
이 마을에서 만난 박한규(가명ㆍ77)씨는 2007년 이사 왔다. 박씨는 “국가를 믿고 빚까지 내가며 이사를 왔는데, 국가가 다시 이사를 가라고 한다”며 “정부가 주는 보상금만으로는 지금 주거환경과 비슷한 집을 얻을 수 없어 빚을 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답답해했다.
14년 전 박씨가 이삿짐을 나른 거리는 불과 400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주거환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했다. “세입자로 살았어요. 그런데 집주인이 기왓장 하나도 세입자들 마음대로 못 갈게 했어요. 장마철에 천장을 통해 비가 새면 세숫대야로 물을 받아가면서 잠을 잘 정도였어요.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이 아니었던 거죠.”
집주인의 ‘갑질’에 고통받던 마을에 1990년대 후반 희소식이 들렸다. 정부가 농어촌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문화마을 조성 및 이주대책 계획을 내놓은 것이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이 경기도청,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청와대 등을 찾아다녔어요. 그 결실로 1999년에 이 일대가 문화마을 조성 사업지구로 선정됐고, 2001년 지금 위치에 새 마을이 세워지는 걸로 승인이 났어요.”
박씨는 2004년 새 마을의 토지 90평을 분양받아 집을 지었다. “일단 토지분양가로 평당 70만 원을 냈어요.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모아둔 돈으로 분양가는 냈는데, 문제는 건축비더라고요. 1, 2층 합쳐서 60평 규모로 집을 지었는데, 당시에 건축비로 평당 350만 원 정도가 들었어요. 결국 1억 원은 대출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주한 41가구 모두 비슷한 상황이었다. 꽤 큰 빚이 생겼지만 박씨는 “마냥 기뻤다”고 말했다. 그는 “반평생을 허물어져가는 집에서 살다가 내 소유의 새집에서 살 수 있게 됐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라며 “말년은 편하게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신도시 예정지 발표는 모든 걸 바꿔놓았다. “잘 살고 있는 집을 내놓고 다른 곳으로 또 이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제 입장에서는 다 이해가 안 가요. 소문으로 돌고 있는 보상금보다 이주자 택지 분양가가 훨씬 높을 거예요. (이주자 택지 입주를 포기한다 해도) 보상금으로는 인근 아파트에 전세로도 못 들어가요. 곧 여든인데, 이 나이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요.”
또 다른 주민인 김모(55)씨는 말했다. “큰 보상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이주대책을 세워달라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 마을은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곳일뿐더러 위치상으로도 충분히 우회 가능한 지역이니만큼 개발구역에서 제외해 달라는 거예요. 이 마을을 이 상태로 그냥 둬 달라는 겁니다.”
정부 예산을 들여 마을을 짓고, 얼마되지도 않아 또 정부가 부수고 다시 짓는다니, 이런 중복 공익사업이 한심하기만 하다. 정부에 정확한 투입 예산을 문의했으나, 시간이 오래돼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씨는 설명했다. “처음 이 마을을 조성할 때 기본 인프라를 만들기 위해서 국가 예산 70억 원 정도가 투입됐어요. 나중에 지중화 공사(전신주를 없애고 전선을 지하로 매설하는 작업) 등을 추가로 진행해 총 600억 원의 예산이 들었다는 얘기도 있고요. 어찌 됐든 막대한 국가예산이 들어간 건 확실해요. 그런데 아직 깨끗한 새 마을을 나랏돈으로 허물고 다시 짓는다는 게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마을 주민들은 정부에 이 같은 의사를 전달했다. 처음에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김씨는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을 넣었더니 지난해 여름에 권익위 직원 두 명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이 우리 마을을 찾아왔어요. 그때 권익위 관계자가 이렇게 좋은 마을을 수용하는 건 국가적인 낭비라면서 마을을 존치해주겠다는 식으로 얘기했어요.”
그런데 올 초 권익위로부터 받은 공식답변은 딴판이었다. 권익위가 주민들에게 보낸 답변문을 요약하면 △기존 공익사업지구였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공공주택지구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이 지역을 제외하면 왕숙1지구의 산업시설용지가 감소해 사업 추진에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내용이었다. 국토부, LH 등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지만, 비슷한 대답만 돌아왔다.
정부부처로부터 마을 존치 요구를 거부당한 주민들은 현재 남양주시청,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진건문화마을을 3기 신도시 개발지에서 제외시켜달라”고 읍소하고 있다.
정부는 이들의 읍소를 외면하고 막무가내로 이 마을을 없애버릴까? 또 다른 거주자인 김경호(가명ㆍ69)씨는 “그냥 조용히 이곳에서 노년을 보낼 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들 내외가 손자를 데리고 오는데,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니까 참 좋아요. 우리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노인들이라 다들 저랑 비슷한 말을 해요. 보상금을 얼마를 주든 저희는 필요 없어요. 내가 지은 내 집에서 가족들과 좋은 시간 보내다 눈 감고 싶어요.”
◆21세기 난·쏘·공 : 글 싣는 순서
<1>살 곳 없는 세입자들
<2>생계 잃은 농민들
<3>내몰리는 상인들
<4·끝>한국식 폭력적 개발 언제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