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늙게 되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나이듦에 대한 책에는 왠지 손이 안 갔던 게 사실이다. 직업 활동이 끝난 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찾으라거나, 치매를 피하려면 사회 활동을 왕성히 하라는 대목에서 불쑥불쑥 반감이 솟아올랐다. 우리에게 마음껏 늙을 자유는 없는 걸까. 생산력을 잃은 노년은 그저 소멸을 기다리는 시간으로만 정의돼야 하는 걸까.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 연구활동가의 시선으로 노년의 삶을 성찰한 사회문화 비평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나이 들면서 품게 되는 질문의 이모저모"라고 책을 규정했다. 노화와 치매, 죽음을 막연한 공포의 대상으로 다루거나 '잘 늙는 법'을 강요하는 대신 노년을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또 다른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따뜻한 빛의 시간'으로 그린 책이다.
60대 중반의 페미니스트가 쓴 열네 편의 비평적 에세이에서는 세상을 관조하는 저자의 그윽한 시선과 성찰이 돋보인다. 노인복지나 심리학 차원이 아닌 페미니즘이라는 필터를 통해 노년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최근 청년층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이 논쟁의 대상이 돼 버렸지만 저자의 말대로 "페미니즘은 삶의 모든 국면, 그동안 역사가 구축해 온 지식체계 전반을 젠더 관점에서 낯설게 보고 새롭게 정초하는 데 힘을 써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그 페미니즘이라는 대안 세계 안에서도 늙고 병들고 아프고 돌보며 돌봄 받는 이들의 이야기는 가장 변방에 머문다"는 데 주목해 노년에 대해 질문하고 탐구하는 일에 나선 것이다.
저자는 몸이 노년기로 접어드는 시기인 갱년기에 대한 단상을 시작으로 여성 노인의 신체 변화와 정치 활동,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등을 직접적 체험과 시·소설·영화·실존 인물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풀어놓았다.
가령 "갱년기에 대한 여성 개개인의 인식은 여성들이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게 가능해진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저자는 "여성들은 자신의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자신의 생애를 이해하고, 또 그것을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면서 "이제는 갱년기를 사적 부담이 아니라, 사회적 의제로 구성해 내면서 그야말로 맘껏 신나게 늙어 볼 일"이라고 적고 있다.
노년의 가장 큰 공포인 치매에 대해서는 "치매 환자에게도 '언어'와 '삶'이 있다"고 말한다. 어머니를 여읜 상실의 슬픔을 겪은 저자는 '사모곡'이라는 장에서 "80대 '치매 할매'와 더불어 보낸 나의 50대는 나이 들고 병들어 죽는 생의 범속한 여정에 대한 범속한 눈뜸의 시간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평생 거칠고 드셌던 억척 엄마"는 "자신의 취약함 속에서 마냥 부드럽고 다정해지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치매 환자는 자기를 잃어버린 '비정상적인 사람' 혹은 '비(非)사람'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자기'인 사람"이라며 "치매 환자는 다른 방식의 '자아'로 '삶'을 살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렇다고 책이 자기 위로에만 치우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어머니를 잃는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과 같은 상실의 슬픔을 겪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고 더 큰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을 깨닫는다. 가정과 노인요양시설에서 여성에게 전가되는 돌봄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한다.
특히 존중받는 노년의 삶은 제대로 작동하는 돌봄 체계를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저자는 "반드시 맞이하게 될 '늙은 자기'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젊은이들의 연대가 길면 길수록 사회문화적·정치적 힘이 커지고, 자연히 노년의 삶도 '자본주의·가족 중심주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