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자국을 중심으로 한 첨단산업 핵심품목의 공급망 재편에 나서면서 우리나라 산업 생태계에도 상당한 파장이 점쳐진다. 반도체와 대용량 배터리 등 핵심품목에 대한 해외 의존도를 줄이고, 이를 자국 내 생산으로 전환하겠다는 미국의 ‘새판짜기’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 우리나라의 수출 경제에 심각한 피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번 조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과정에서 노출된 자국 내 공급망 취약점을 보완하고 동시에 글로벌 공급망 구조에서 강자로 부상하는 중국을 고립, 견제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최대 피해자는 중국과 함께 한국이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8일 업계와 정부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자국의 공급망 재편을 위한 새로운 조치들을 8일(미국 현지시간) 발표한다. 여기엔 핵심품목의 자국 내 생산역량 강화방안에 더해 동맹국과 협력을 통한 미 제조업 부흥책 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백악관은 이날 언론에 배포한 자국 공급망 검토 결과에서 "보건 및 경제위기로 증폭되기는 했지만 수십 년간의 투자 부족과 정책적 판단이 다양한 분야와 제품에 있어 취약한 공급망으로 이어졌다"고 진단했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월 24일 4대 핵심품목(반도체, 대용량 배터리, 의약품, 희토류)에 대해 100일간 공급망을 점검, 대응전략을 마련해 보고하라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종합보고서는 행정명령 서명 이후 100일째인 4일 백악관에 제출됐다. 미 상무부(반도체)와 에너지부(대용량 배터리), 보건복지부(의약품), 국방부(희토류)가 각각 조사를 맡았고, 이를 토대로 국가안보보좌관(APNSA)과 국가경제위원장(APEP)이 종합적으로 검토해 작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의 이번 재편 작업은 4대 핵심품목의 자국 내 공급망 취약점이 잇따라 노출되면서 시작됐다. 지난해 초 코로나19 발생 이후 자국 내 치료제 및 백신, 마스크 등의 생산 차질로 의료 공백이 발생했다. 또한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 미국 자동차기업들의 생산 중단도 빚어졌다. 여기에 중국이 무역전쟁을 벌이는 미국에 희토류 수출 제한까지 검토하자 미국 첨단산업의 핵심품목 수급 불안정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히 4대 핵심품목에서 커진 중국에 대한 의존도는 미국을 자극했다. 미국은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의 부상을 가장 크게 경계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25년까지 자국의 반도체 자립도를 70% 수준까지 올린다는 ‘중국제조 2025 프로젝트’에 따라 1,500억 달러(170조 원) 규모의 막대한 정부 보조급을 지급할 계획이다. 미국은 이번 공급망 재편으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중국 굴기도 저지하겠다는 계산이다.
문제는 미국 공급망 재편의 타깃이 중국임에도 최대 피해국은 한국까지 포함될 것이란 분석이다. 미국이 수입 반도체를 자국 생산 반도체로 대체할 경우 미칠 경제적 영향을 분석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조사에 따르면, 반도체가 포함된 전기·전자산업 연간 생산량은 한국이 0.18% 감소, 중국(-0.32%) 다음으로 피해가 컸다. 이에 따른 한국의 연간 국내총생산(GDP) 감소폭(-0.07%)도 중국(-0.35%)에 이어 두 번째로 컸다. 중국으로의 반도체 수출 비중이 60% 이상으로 편중된 데다, 한·중 간에 복잡하게 얽힌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협력 구조 탓이다.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공급망 재편 전략에 한국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백악관이 발표할 공급망 재편 방안에는 다양한 대응책들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우선 핵심 공급망을 약화시키는 정부 보조금과 같은 외국의 불공정한 무역 관행에 대응하고, 동맹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역 기동타격대'를 설립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또한 미국 수출입은행 산하 미국 제조설비 및 인프라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금융 지원프로그램도 신설한다. 아울러 국방물자생산법을 활용해 필수 의약품 생산을 위한 공공-민간 컨소시엄도 구성한다. 특히 백악관은 이날 중국이 전기차 배터리 광물의 최대 가공처리 국가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노력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미국의 공급망 재편은 결국 우리나라 수출활동의 전반적인 위축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중국을 배제한 우리나라의 공급망 재구축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고, 미국 원산지 규정준수 등에 따른 생산원가 상승은 자금여력이 부족한 중소 제조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이 첨단산업의 자국 경쟁력을 강화함에 따라 반도체나 배터리 등 우리나라 주력산업의 글로벌 경쟁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점쳐진다.
일각에선 미국의 공급망 재편을 통한 대(對)중국 견제에 동맹국인 한국의 동참을 요구해올 경우 우리나라 기업들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보복조치 가능성도 우려한다. 이정선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통상지원팀 연구원은 “미국이 우리나라에 대 중국 거래를 규제하거나 희토류 수입금지 등을 요구할 경우 미중 사이에서 한국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일 것”이라며 “과거 중국의 사드 보복 같은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