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특허 면제 대신 공급 확대로 가난한 나라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부족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내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안할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과 중국이 지지하는 개발도상국의 백신 특허 면제 구상에 대안 제시 형태로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식화하겠다는 것이다. 면제 협상 타결이 물 건너가는 분위기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입수해 3일(현지시간) 공개한 EU의 대안 계획 초안을 보면 △백신과 백신 원료 수출 규제를 풀고 △전 세계 백신 제조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기존 무역 규정을 필요한 나라들이 개별 특허 면제 협상에 활용하기 쉽게 만들자는 게 EU 제안의 뼈대다. EU 관계자들은 백신 지식재산권(지재권) 면제 문제가 논의되는 다음 주 WTO에 이 방안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WSJ에 전했다.
세계적인 ‘백신 부익부 빈익빈’ 현상 해소에 지재권 면제라는 예외 허용은 실효가 없다는 게 EU 논리다. 특허를 풀어줘 봐야 기술적 한계 탓에 당장 증산이 가능하지 않은 데다, 오히려 변이 바이러스 차단 목적 백신 개선 같은 제약사들의 연구ㆍ개발 노력 의지만 꺾는 꼴이 되기 십상이라는 게 EU 측 주장이다. EU 관계자는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할 협상에 매달리느니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실행 가능 옵션을 들여다보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EU의 대안은 백신의 생산ㆍ유통 활성화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생산 확대를 위해서는 보조금 지급을 허용하고 수출 규제가 이뤄지지 않도록 WTO가 감독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게 EU 요구다. 또 비상 상황 의약품 생산 면허 발급 절차가 너무 까다롭다는 개도국 불만을 반영해 WTO의 기존 지재권 협정(TRIPS) 조항을 간소화하는 게 새로 면제 협상을 벌이는 것보다 훨씬 빠를 거라고 EU는 조언한다.
이런 구상은 제약사들과 통한다. 망설이던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지난달 지재권 면제 찬성으로 입장을 정한 뒤 제약사들은 더 효과적인 대안이 있다며 로비를 강화했다. 자발적으로 세계에 걸쳐 300개의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성인 전부가 맞을 수 있는 양의 백신을 생산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여건이 녹록하지는 않다. 지난해 10월 지재권 면제를 처음 제안한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면제 기간을 최소 3년으로 구체화한 제안서 개정안을 지난달 WTO에 제출했고, 애초 양국과 뜻을 함께한 60여 개국 외에 추가 찬성국도 속출하고 있다. WSJ에 따르면 이번 주에도 뉴질랜드와 우크라이나가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면제 관철은 구조적으로 어렵다. 다자(多者)기구인 WTO의 경우 ‘컨센서스(만장일치)’ 기반으로 의사 결정을 하기 때문에 협상 시작부터 타결까지 오래 걸린다. 현재 EU뿐 아니라 영국과 스위스도 면제 반대 입장이다. 거꾸로 제안국들의 입장이 바뀔 여지도 없지 않다. EU 양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다. 지난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옌스 슈판 독일 보건장관이 남아공을 방문해 백신 생산 확대를 위한 자금 지원을 제안했다. WSJ는 “EU의 태도가 면제 협상을 완전히 좌초시킬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