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 군의 전투력을 갉아 먹었나

입력
2021.06.04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군생활을 하던 1990년대 중후반, 된장국의 또 다른 이름은 'X국'이었다. 이 음식은 요즘 말로 비주얼이 정말 별로였다. 맛이라도 좋았더라면 그 이름 정도는 문제가 안 됐을 텐데, 울타리 밖에서 먹던 것과 달랐다. 음식 이름에 붙어선 안 될 단어가 붙은 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0년도 훨씬 지난 지금, 예비역 병장의 추억록에나 있어야 할 X국을 소환한 것은 건더기 없는 오징엇국을 시작으로 군 부대 곳곳에서 터져 나온 부실 배식 사태다.

채식주의자가 아닌데도 토마토로 배를 채웠다는 어느 병사의 울분과 3명이 먹어도 모자랄 반찬을 무려 16명에게 배식했다는 폭로까지 나왔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는 나라 군대에서 '못 먹어 서럽다'는 하소연이 쏟아지자 적지 않은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앞서 군을 경험한 예비역들은 과거와 다름없는 군의 대응 방식에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군 일각에선 부실급식 문제가 불거지자, 그 원인을 휴대폰에서 찾았다. 일과 후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장병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반찬투정' 을 늘어놓은 것 정도로 여겼다는 뜻이다. 포로에게도 주지 않을 부실 배식의 진짜 원인을 찾고, 지휘관부터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는 게 먼저라는 상식과는 동떨어진 대응이다.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부실 배식을 따지러 온 국회의원들에게 확 바뀐 식단을 내놓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 장병의 처우 개선보다 지휘관 문책, 전출 등 앞으로 닥칠지 모를 징계를 어떻게든 막아 보려는 얄팍한 모습에 '윗선을 어찌 믿고 전투에 임하겠냐'는 이야기까지 도는 현실을 그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바뀌지 않은 병영 내 악습은 이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 강원도 동부전선의 부대에서 한 간부가 전투체육 도중 병사를 폭행, 6주 진단의 골절상을 입히고도 사건을 무마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가해자의 동료 간부는 "부모에게도 알리지 말라"며 피해 병사를 협박해 더욱 충격을 줬다.

최근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여부사관 사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이 터지면 '입막음'부터 하고 보려는 게 군 당국의 또 다른 주특기라는 사실이 새삼 확인되고 있다.

불투명하고 변화에 둔감한 병영에서 최근 불거진 일련의 사태와 관련, 인터넷에서 이야기 하나가 큰 공감을 얻고 있다. '군인의 '인'자는 사람인(人)이 아니다'라는 내용으로 압축되는 글이다.

군 수뇌부나 일선 지휘관, 간부들에게 X국만도 못한 밥상이 차려졌다면 '부대원들도 먹으니까 참자'며 조용히 숟가락을 들었을까. 군대에서 억울하게 얻어맞은 제 아들이 신고를 하지 못하는데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이니 기꺼이 즐기라'고 했을까. 이에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답할 지휘관이 몇 명이나 있을지 궁금하다.

대한민국의 안보는 20대 청년의 희생으로 유지돼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정의와 공정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한창 나이에 학업과 생업을 뒤로하고 기꺼이 군복을 입은 장병들은 국가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국가의 전투력에서 장병들의 사기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없다. 부실 배식과 같은 비전투 분야로 인한 손실은 명백한 지휘관의 실책이자 중징계 감이다. 군 당국이 대국민 반성문을 내놔야 할 때다.

박은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