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아내 태우고 분노의 보복 운전... 늘어나는 '도로 위 헐크'

입력
2021.06.0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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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복운전 매년 5000건 안팎… 절반 가량 법정행
자기중심적 사고·차량 속 익명성이 폭력성 키워
'포스트 코로나' 교통량 급증 속 갈수록 심각해져
"상대가 잘못했어도 보복운전 땐 처벌 감수해야"

# 영동고속도로에서 추격전이 벌어졌다. A씨가 몰던 SM5 차량이 30대 김모씨의 BMW 차량 앞으로 끼어든 게 발단이었다. 김씨는 2차선을 주행하면서 3차선을 달리던 A씨의 차량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임신 5개월 차 아내가 앉은 조수석 쪽이 상대 차량에 부딪힐 듯 가까워지는 상황이 반복됐지만 김씨는 멈추지 않았고, 이런 위험천만한 보복운전은 14.5㎞를 달리는 동안 계속됐다. 사건 이듬해인 2019년 인천지법은 김씨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 서울 강남구 수서동 일대를 지나던 40대 박모씨는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은 채 차선을 변경했다. 놀란 포르쉐 운전자 B씨가 바로 뒤에서 경적을 울리고 경고등을 켜자, 박씨는 도로 복판에서 갑자기 멈춰섰다. 옆에 탄 아내가 "빨리 가자" "애들 태우고 이러지 말라"고 제지했지만, 박씨는 30초 뒤 출발하는 듯하다가 다시 급정거했다. 박씨 가족이 탄 차를 들이받은 B씨는 결국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고, 박씨는 2016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재벌가 경영자인 구본성 아워홈 부회장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보복운전 문제가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김씨 사례에서 보듯이 보복운전은 자신과 상대방 운전자는 물론이고, 동승자와 주변 운전자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폭력적 행위다. 전문가들은 보복운전을 초래하는 심리적·문화적 요인과 그 위험성을 명확히 인식하지 않을 경우, 교통량의 폭발적 증가가 예상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심각한 사회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임신한 아내 태운 채 분노의 레이스

3일 한국일보 취재에 따르면 국내 보복운전 사건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보복운전 신고 및 적발 건수(경찰청 집계)는 2017년 4,431건, 2018년 4,417건에서 2019년 5,537건으로 급증했다. 이 기간 발생한 보복운전 사건 1만4,385건 중 6,546건(45.5%)이 기소 처분을 받았다.

형사정책연구원의 운전자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 2,000명 중 719명(36%)이 보복운전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에게 가해 원인을 묻자 △상대 차량이 진로 방해를 해서(22.6%) △시간적 여유가 부족해서(17.9%) △빨리 가기 위해서(16%) 순으로 응답률이 높았다. '평소 운전 습관' 때문이라고 답한 이들도 4.7%였다.

이런 현실은 구본성 부회장 사건으로 새삼 재조명됐다. 고(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손자인 구 부회장은 지난해 9월 5일 서울 강남구 학동사거리 인근에서 BMW 차량을 운전하다가 피해자 A씨의 벤츠가 앞에서 끼어들자, 벤츠를 도로 앞지른 뒤 급정거해 추돌 사고를 유발했다. A씨가 차에서 내려 "경찰에 신고했다"며 항의하자 구 부회장은 A씨를 차로 들이받아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혔다. 특수재물손괴 및 특수상해혐의로 기소된 구 부회장은 이날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내 진로 방해했다" 자기중심적 사고가 문제

전문가들은 보복운전을 자기중심적 사고와 결부한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기편향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차가 조금 늦게 가는 듯하거나 누군가 진로를 방해해 자기 이익이 침해됐다고 판단하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보복운전을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특히 세상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면서 즉각적 반응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많아지고, 도로에서도 화를 참지 않고 응징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자동차가 제공하는 익명성도 보복운전을 촉발하는 원인으로 꼽힌다. 차 안에 있으면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을 누구도 알 수 없으니 맘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최수형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관은 "관련 연구를 진행한 결과, 보복운전 가해 경험자는 '자동차를 타고 있으면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여기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높고, 그로 인해 공격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고 설명했다. 장경욱 교통안전공단 책임연구원은 "자동차라는 나만의 공간이 상대 차량 때문에 침범받았다는 생각이 들면 욕설이나 보복운전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 이후엔 더욱 경각심 필요

보복운전 예방책으로 가장 중요한 건 교통법규 준수다. 운전 중에는 다들 사고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만큼, 급작스러운 차선 변경 등으로 상대 운전자에게 위협감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 차량이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주행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 역시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동귀 교수는 "피치 못하게 끼어들어야 할 땐 깜빡이를 켜는 등 상대방과 미리 소통할 필요가 있다"며 "또 보복운전은 모두에게 위험하며 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수형 연구관은 "어떤 경우에든 폭력적 대응을 하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며 상대 운전자의 책임이라고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가 잦아드는 시점에 보복운전에 대한 경각심을 더욱 높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상옥 삼성교통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코로나19 유행이 완화되면 여가활동 증가, 개인 위생관념 강화 등과 맞물려 개인 차량 이동량이 많아질 것"이라며 "그러다 보면 조급한 운전이 많아지고 사소한 것에도 폭력성이 높아지는 도로 환경이 조성되기 쉽다"고 지적했다.

오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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