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폐로만 숨을 쉬는 40대 여성이 그나마 기능이 남아 있는 폐에 폐렴이 생겨 병원에 왔다. 게다가 임신 상태였다. 남아 있는 한쪽 폐마저 폐렴으로 망가지게 되면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숨을 쉬어야 할 뿐만 아니라 생명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담당 내과 과장님은 그에게 아이가 있는지(이번이 두 번째 임신이라 했다), 지금의 임신은 계획된 것이었는지(우연히 가지게 된 것이라 했다) 묻고는 고심 끝에 중절을 권했다. ‘본인의 생명도 위험한 상황인데 임신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이고 ‘임신 중에는 쓸 수 있는 약도 제한되며 태아에 대한 안정성도 보장할 수 없어 아기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정중히 과장님의 권유를 거절했다.
"제게는 일곱 살 난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 아이도 애타게 기다려서 갖게 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이를 길러보니 정말 애가 있다는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저에게는 지금 뱃속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갖게 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뱃속의 아기를 지우라는 것은 제겐 일곱 살 난 아이를 죽이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의사선생님 말씀은 잘 알겠고 또 의사 입장에서 그렇게 권하시는 것을 이해하지만, 아기는 못 지우겠어요. 최대한 고려해서 약을 써 주세요. 그 이후의 일은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병실 회진 후 밀린 일을 끝내고 전공의 숙소에서 자려고 누웠는데 그가 떠올랐다. 불 꺼진 숙소 껌껌한 천장에서 그의 눈물이 내 가슴 위로도 떨어졌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늘 생명을 다루는 게 일이면서도 나는 과연 생명에 대한 일말의 경외심이라도 갖고 있기는 한 걸까. 내게 있어 환자들은 나와 교감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기보다, 내 어깨를 짓누르는 통증의 덩어리가 아니었을까. 한밤중 병동 콜로 내 단잠을 흔들어 깨우고, 자꾸만 징징거리며 해달라는 게 많은 피곤의 근원,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한 달 후. 내과 과장님은 심초음파를 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폐렴이 악화되어 상급 병원으로 전원됐던 그의 죽음을 알려줬다. 잠시 침묵이 있었지만 심초음파가 끝나고 뒤이은 오후 회진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학구적 문답과 가벼운 농담들이 몇 번 오간 후 회진은 끝났고, 나는 나머지 차트를 정리하고 인턴 선생이 사 온 아이스크림을 간호사들과 나눠 먹으며 이런저런 잡담들을 하다 일을 마쳤다.
모처럼 퇴근하는 길. 그가 생각났다. 그와 일곱 살 난 아이와 남편 그리고 뱃속 아기, 떠나간 사람이 품고 갔을 아픔과 남겨진 사람이 겪게 될 슬픔들,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막연히 가늠하면서 집으로 가는 길은 한없이 아득했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기대어 호흡하면서 상태가 점점 안 좋아져 상급 병원으로 가던 당일. 수면 상태에서 잠깐 깨어날 때마다 그는 나에게 손짓을 했다. 기계 호흡기를 달고 있는 사람이 대개 그렇듯 고통스러워서 그런가 보다 짐작하고, 하고 싶은 얘기를 써보라고 준 연필로 그가 안간힘을 다해 쓴 글씨는 '아기'였다.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 있는 순간에도 뱃속의 아기를 걱정하며 그 아기가 괜찮을지를 내게 물어 온 것이다.
그는 결국 자신을 지키는 데도, 아기를 살리는 데도 실패했다. 결과만 가지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아마 어리석다고 말할 것이다. 이해한다. 그의 가족이라면 나도 그를 말렸을 것이다.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것을 거듭 당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없다. 과정을 결과로만 판단한다면 이 냉혹한 세상에서 실패할 일밖에 없는 우리들 대부분은 지워진 삶이 될 것이다. 그의 선택과 죽음을 함께 경험했던 나는 그가 나를 바꾸어 놓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길은 하나의 거울처럼 우리를 보여준다. 내가 가지 않을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 낙태에 대한 반대로 곧바로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낙태를 찬성하는 이들에게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도 옳지 않다. 무엇보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이 그와 다른 선택을 하는 여성들을 공격하는 용도로 쓰이는 걸 바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낙태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다만 한번쯤은 단 1분만이라도 조용히 눈을 감고 우리가, 여기 살아 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인지 실감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지켜주고 싶었던 ‘아기’가 바로 나이고, 내가 매일 병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실감했던 것처럼. 그 실감이 결국 나의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을 조금 바꾸어 놓을 수 있도록. 그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아도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생명을 지키려 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잠깐이라도 안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20년 전 그가 썼던 '아기'라는 글자가 우리 모두의 이름임을 깨달았던 어느 전공의는 하지 못했던 일. 실패했던 그, 마지막까지 외로웠을 그를 우리가 안아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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