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운동 전후 미국 국무부가 만든 외교문서가 추가 공개됐다. 당시 한국의 국방부 장관은 자신에게 군부 통제권이 없는 상황을 시인했고, 미국도 신군부의 리더인 전두환을 실권자로 인정할지를 두고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 생생하게 담겼다.
미 국무부는 2일 5·18 관련 외교문서 14건, 총 53쪽 분량을 추가 공개했다. 1990년대 공개된 문서 중 일부 삭제돼 있던 내용을 추가 공개한 것이다. 5·18과 관련, 진상 규명을 위한 외교부와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요청을 수용하면서다.
추가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1979년 12·12 사태 직후 1980년 1월 한국을 찾은 레스터 울프 미 하원 아시아·태평양 소위원장은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을 면담했다. 울프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한국 군부의 안정과 정치 발전을 위해 주 장관의 역할을 당부했다. 그러나 주 장관은 "나는 군에 대한 어떤 영향력도 없다"며 "당신들이 나를 도와달라(You must help me)"라고 말했다. 12·12 사태 이후 임명된 자신은 사실상 '허수아비' 신세임을 자인한 것으로, 군령권이 당시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완전히 넘어가 있던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미 국무부가 신군부 리더인 전두환을 압박했던 장면도 담겼다. 같은 해 3월 국무부는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에게 "한국군 내부 갈등이 지속되고 불안정한 상태에선 한미연례안보회의(SCM)를 개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한미 군 당국 간 최고위급 협의체 가동을 중단함으로써 전두환을 압박한 셈이다.
다만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이 이번 만남을 올리브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이) 그의 높아진 위상을 수용하고 당신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두환이 미 대사의 접촉을 자신에 대한 지지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본국에 전한 것이다. 그 해 6월 예정됐던 SCM은 열리지 않았다.
미국은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을 때 "신군부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전두환이 그 리더"라고 판단했다. 최규하 당시 대통령에 대해선 'helpless(무력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
5·18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판을 둘러싼 한미 간 기싸움도 드러났다. 7~8월 주한 미국대사관이 작성한 문서에는 김대중이 변호사를 구하지 못하고 있으며 가족 접견도 제한된 상태라며, 이에 박동진 당시 외무부 장관은 "변호하겠다고 나서는 변호인이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고 했다. 또 박 장관은 당시 국제 앰네스티 등 국제 인권단체의 재판 참관 요청에 대해 "해당 단체들이 편향적 시각에서 재판을 볼 수 있다"고 반대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는 5·18 진상 규명의 핵심인 발포 명령 책임자에 대한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최영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 1과장은 "사실 우리에게 절실한 문서는 당시 한미연합사령부의 자료"라며 "외교부를 통해 계속해서 요청했으나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측이 이번 14건의 문서를 추가로 공개한 것을 봤을 때 미 군부 자료도 전향적으로 공개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